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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6 - 혼돈의 시기, 같은 음악을 하던 친구를 만나다

고3이 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간 약간 아주 약간 미루어 두었던 공부를 해야 했지요. 제가 워낙 좀 독한데가 많습니다. 그간 손에서 놓지 않던 제 분신 같던 허리부러진 기타의 스트링을 일부러 뻰찌로 다 잘라버리고, 1년간 기타를 잡지 않으리라 결심합니다. 그리고 정말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기타를 잡지 않았습니다. 

일단 다시 틀어박혀 공부만 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는 참 힘이 들더군요. 그래도 음악이 늘 옆에 있어 참을만 했습니다. 고3, 1년간의 제 음악적 감성을 지배했던 건 존 바에즈 (Joan Baez) 였습니다. 미국 포크뮤직의 살아있
는 역사같은 사람이지요. 사실 주로 전설의 포크가수 밥딜런의 노래를 많이 불러 히트했지만, 미국 전통 포크도 거의 섭렵한 사람입니다. 제게 그녀의 카셋트테이프가 3개 있었는데, 일년내내 귀에서 울리던 건 언제나 그중 하나였습니다. 기타는 놓았지만, 머릿속에선 언제나 6현이 뚜렷하고 한번도 연주해보진 않았지만, 기타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부를 수 있을만큼의 이미지 트레이닝만을 반복했습니다. 영화에도 보면 이유없이 갇혀 지내게된 올드보이의 주인공이 혼자하는 운동과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 탈출시에 그 멋진 고강도 장도리 액션을 펼쳐내지요. 뭐 그런 식이랄까요?

참, 그때쯤 되니 우리나라의 휴대용 카셋트플레이어도 기술이 발달하여 아주 작아지고, 조용해졌습니다. 전 대우의 아주 깜찍한, 손안에 쏙들어가는 플레이어를 구입하여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습니다. 
 
물론, 가사도 다 외울만큼 되었습니다. 얼마나 들었으면..... 물론, 영어는 책으로만 접하던 그당시 고등학생이 어찌 그 가사를 다 듣고 이해했겠습니까. 워낙 많이 들으니 그래도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게 되고, 모르는 건 요령껏 넘어가더라도 외워지기도 하더라구요. 제 블로그 외국음악 카테고리에 있는 Jackaroe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했는데, 사실 워낙 빠르기도 하고 약어같은게 많아 도저히 제 실력으로는 해독 불가능이라서, 미국에서 전학온 한국말도 잘 못하는 교포친구에게 단팥빵 사주며 받아적게 한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 적은 가사를 들고 희열에 떨며 사각연필통을 기타지판삼아 도다른 음악하는 친구에게 받은 코드를 연습하기도 했네요. 나중에 대입시험이 끝나고 제일 먼저 기타를 잡고 부른것도 이 노래들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미지트레이닝......  암튼, 힘겨웠던 대입준비를 마치고 났습니다. 


직장에 다니던 큰 누나가 저를 조용히 데리고 나가 기타를 사주었습니다. 허리 제대로 달린걸로..... 어찌나 기쁘던지...... 그러고 보니, 제 기타는 다 누나들이 사준거네요. 그것도 클래식 기타를 샀습니다. 아! 로망스....ㅋㅋㅋ (잊어버리기전에...)

약간 무료했던 겨울동안 본격적으로 클래식기타를 배워 보리라 다짐하고 일부러 상당히 유명한 선생님께 갔는데, 그 선생님은 너무 바빠서 얼굴도 못보고, 그 부인이 또 기타 선생님으로, 다 그 분께 배우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런 이런..... 사실 기타를 처음 배워보는지라.... 지겹게 스케일을 반복하고, 굳었던 나쁜 습관을 고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1-2개월 되었을까요? 그 선생님이 산달이 다가왔다고 그만 하산하라는 거였습니다. "아니 되옵니다, 이 제자는 부족하여 아직도 배워야 할것 이 많사옵니다....." 어쩌구 할 사이도 없이 쫒겨 났고, 그 이후 출산후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소심한 복수라하지요. 복수당한 사람은 그런지도 모르는....). 무슨 선생님이 그래 이러면서요. 

대신 운명이려니 하며 포크음악에 전념하였습니다. 1년간의 이미지 트레이닝과 대입후의 남는시간을 온통 투자한 각고의 연습 끝에 노래도 기타음에 맞추어 나갈 수 있게 되어 갔습니다. ㅎㅎㅎㅎㅎ(희망이 보입니다). 

졸업을 하기 조금 전 친구 형인 기환이형이 우리를 한 맥주집에 데리고 갔네요. 어색하게 들어선 그곳은 환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예전엔 명동부근에 세 개의 백화점이 있었지요. 미도파, 신세계 그리고 코스모스 백화점이 그것입니다. 미도파는 롯데가 인수하여 오래전에 롯데 백화점이 되었고, 신세계는 아직도 있겠지만, 코스모스는 그 전에 망해서 건물만 놓여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코스모스 건물 몇층 인가에 가수 전영록이 경영하던 라이브 생맥주 비어홀이 있던 거디었던 거디었습니다. 영xxx 라는 이름이었는데, 지금 정확한 이름은 생각이 안나네요. 통기타와 생맥주는 청바지와 함께 젊음의 상징 같은거였죠. 그곳에서 양희은, 노사연, 송창식, 그리고 이문세를 보았습니다. 이문세는 별 히트곡없이 방송MC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는데, 라이브음악을 들으며 정말 노래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로 팝송을 했던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소리의 울림이 장난아니더군요. 암튼, 그곳에 있던 두어 시간동안 거의 정신을 쏙 빼놓고 음악을 듣고 그들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과연 저들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말이지요. 

학교는 건국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건대는 음악적으로 조금은 알려져 있던 학교였습니다. 각 학교마다 대개 노래패나 그룹사운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종합예술인으로 활동하는 홍서범이 있던 불놀이야의 옥슨이 워낙 유명했고, 제가 고등학교때 열린 대학가요제에서 건대의 듀엣 마음과 마음이 '그대 먼곳에' 라는 곡으로 대상을 탔습니다. 부산의 동아대도 무척이나 음악적인 전통강호였고, 한양대는 징검다리가 있어 조금 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가입할 만한 써클이 없더군요. 통기타는 없고 풍물패와 그룹사운드만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래도 인연이 있던 (스케일만 하다 쫒겨나긴 했지만) 클래식 기타반에 들었어가게 되었지요. 하지만, 일주일만에 탈퇴했다는거....  역시 전 클래식 체질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 당시의 대학가의 분위기를 미리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네요. 우선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86년은 정치적 격동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체육관 투표로 탄생한 전두환의 군사정권으로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진듯 하나,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깜깜한 암흑기 였죠. 입학을 하고는 일주일동안은 분위기에 적응하랴, 개강파티에 술마시랴 정신없이 자나갔습니다. 일주일 후.... 우당탕... 학교의 분위기가 어우선해지더니 갑작스런 시위가 일어납니다. 처음보는 시위에 당황하기도 했지요. 대개 1학년들은 숨기 바빴고......... 암튼, 여러 이유로 총학생회 집행부는 수업거부를 결의하였고, 일주일동안 대부분의 수업 syllabus만을 받고는 수업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겁니다. 그와 연계하여 그 다음해의 대선을 앞두고 호헌철폐에 대통령직선제를 들고 나온 대규모 학생시위가 본격화 됩니다. 그 와중에 일찌감치 결정된 아시안게임이 다가오고, 여름이 다가올무렵.... 학교는 문을 닫습니다. 털썩!!!





학교가 잠실 주경기장과 가까운데, 데모로 최루탄이 날리면 안된다는 이유였답니다. 그렇다고 휴교령까지 내릴건 없지 않았나 하는...  휴교란 방학과 달리 알흠다운 전투경찰 아자씨들이 학교를 삥둘러싸고,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더군요. 암튼, 휴교는 바로 여름방학으로 이어졌고, 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겁니다. 그간 수업은 한번도 제대로 받아본적이 없었지요. 학생이 수업을 못받으면.......... 행인이더군요. 

암튼, 그렇게 학교는 오지만 수업은 없었던, 도 그러다가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던 그 혼돈의 시절.... 거의 매일을 최류탄의 매캐한 연기속에서 보내다가 집에오기 일쑤였는데, 제대로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최루탄에 매케해진 목을 씻는다며 술만 들이 붓던 시기였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이 너무 아깝기도 하고, 시커멓다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친구가 집혀가고, 머리가 깨지는 현실은 우릴 점점 더 고민만하는 룸펜으로 몰아만 가더군요. 

새벽에는 학원에 다녔지만, 몸담은 써클도 없어 학교에 와서 어슬렁 거리다 친구들과 엄한데만 쏘다녔습니다. 그즈음 친구를 하나 만났습니다. 성호라는 친구인데 이 친구의 기타솜씨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거의 매일 만나 한잔커피에, 또 한주전자의 막걸리에 인생을 논하고 또 매일 처럼 노래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노래만 할 수 있으면 어디든 갔지요. 한적한 카페나 교외는 우리의 주무대였습니다. 시대상황이나 학교상황은 완전 개판이었지만 방황하는 청년은 또 그들대로 이렇게 방황하게 되더라구요. 그전에는 기타도 노래도 둘이 해본적은 없었는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듯 하더군요. 마치 둘이 해바라기라도 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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