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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10 - 방위..... 외로움에 목놓아 노래하다.

고향..... 충청남도 청양에서의 방위생활은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고향이긴 하지만, 어려서 떠난 곳이라 친구도 그리 많지 않았고, 워낙 화려하게 (?) 왁자하게 살다 와서 그런지 5시면 일과가 끝나는 방위의 특성상 남는 저녁과 밤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허전하여 송곳으로 허벅지를......   그건 아니지만..... 모든 것이 낯선데다, 가까운 친구도 별로 없던 시골 생활...... 가기전에는 "그간 힘들게 일했으니 푹 쉬다 오면 되는거지 뭐".......안일한 생각이었더군요. 무엇보다 넘치던 열기를 발산할 수가 없으니 미치겠더군요. 밤마다 뒷산에 기타를 메고 올라가 허전한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미친듯이 노래를 하곤 했습니다. 한밤중에 그것도 기타를 메고 뒷산에 오르던 방위병. 그것이 제 모습이었지요. 시골에 내려와 함께 사시기로 했던 어머니도 그즈음해서 안오신다고 하고, 내가 도대체 왜 시골에서 생활을 했어야 하는거지 하는 반발심도 있었구요. 그저 매일 술마시고, 가슴이 시원해질때까지 혼자 노래하고.....

충청남도 청양은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변했다는데...예전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깡촌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청양군청 홈페이지

구기자가 유명하고, 사실 기원은 어찌되었건 청양고추로 알려져 있네요. 주병선이 부른 콩밭매는 칠갑산이 위치한 곳이죠. 내륙이긴 하지만, 비교적 서해안에 가까와서 대천도 20분 거리이고, 새우젖으로 유명한 광천도 비교적 가깝습니다. 요즘은 장승축제나 고추아가씨 선발대회등도 한다니... 문화적으로도 이젠 때를 벗은것 같습니다.


몇 달 후 부대에 반가운 신병이 왔습니다. 저의 가장 오랜 친구, 언제부터 친구인지도 잘 모르는, 그동안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내던 信友로 최인양이라는 친구였지요. 대전에서 고교를 마치고, 성균관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투신, 그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구치소에 갔다가 바로 국가의 권유를 받아 (?) 입대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오고부터는 조금은 마음이 나아졌네요. 그 친구는 성대 노래패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저와 음악 스타일은 달랐지만 함께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제 노래를 그 친구는 퇴폐라 하고, 전 그 친구의 노래를 단순한 악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며 서로 웃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는 자기 노래를 비장하다 또 순수하다 라며 자평하긴 했지만.... 친한 만큼 충돌도 많았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대학 써클은 1980년에 생겨, 중간에 돌출된 사회참여적인 분위기의 회원들과의 마찰로 결국은 써클이 와해되었고, 떨어져 나간 노래패만이 남게되어 해체되고, 1986년에 재창립이라는 진통을 겪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사회 혹은 대학의 분위기로는 우린 퇴폐라 불리워 질수 도 있었겠지요. 다만 우린 노래에 너무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선 음악 자체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생각들이었고, 그냥 우리가 하는 음악의 순수성을 믿었습니다. 약간은 민중가요에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선배들이 있었기에 조금은 그런 분위기에 젖어가기도 했네요. 그랬기에 워낙 친한 사이였지만, 사실 음악만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집안끼리도 잘 아는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모종의 정치적인 사건을 겪으신 분으로 알려져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지만), 대학을 다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갑작스레 고향에 내려와서 생활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물론 저보다는 10살 정도는 위였지만, 늘 반갑게 대해주셨지요. 그 형님은 열린마당이라는 글방(?) 을 통해 청양의 청소년들에게 독서지도를 하고 계셨고, 별다른 지원이 없어 자비로 힘겹게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청양에서 모종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겐 정신적 지주같은 분이었지요. 그분은 늘 해탈한 사람의 분위기가 느껴졌고 저나 제 친구는 금방 경도되어 갔습니다.  청양이라는 곳은 참 재미있고도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촌이었는데도, 초등학교, 남자 중학교 그리고 여자 중학교가 있었고, 농업고등학교와 여자 상업고등학교가 하나씩 있는 인구밀도에 비하면 학생 (청소년) 층이 두터운 곳이었습니다. 다만, 학생들을 위한 문화공간이란 전무하다시피 했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곳에 사는 다른 지역 청소년들과 달리 문화적 탈출구가 없었지요. 극장도 없을 정도여서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나가 탈출구를 찾곤 하였습니다. 열린마당 형님이 하시던 글방은 항상 활동하는 아이들도 사실 몇 명되지 않았고, 그보다 더 활동적인 단체는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그 형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청소년을 위한 문화교실을 꾸며볼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대개 방위) 대강의 활동계획을 짜고, 포스터도 만들어 붙이며 새로운 문화단체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이름하여 청소년 음악교실...... 

당시의 멤버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친한 친구는 앞서 이야기한 인양이라는 친구이지만, 그 이외에도 그간 사귀어 둔 (물론, 동창이긴한데 좀 낯설던...) 여러 친구들이 함께 했습니다. 우선 포크음악을 한 저와 민중가요를 했던 인양이, 음악다방에서 DJ를 하여 팝뮤직에 대해 해박했던, 그러나 노래는 전혀 못하던 진환이, 그리고 밤무대에서 반주를 하며 노래도 했던 양수, 거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다 해 줄만큼 맘이 넉넉했던 우리의 총무 영준이가 함께했습니다. 

준비과정에 함께 맞추어본 노래는 실로 놀라울 만큼의 불협이었습니다. 우선, 부드럽게만 부르는 내 노래와 비장하게 부르는 인양이의 음악은 맞지 않았고, 정통 밤무대 출신 양수는 변진섭의 “사랑이 필요한거죠”라는 노래도 윤수일의 아파트처럼 불러 제꼈습니다. 물론 노래는 참 잘했지요. 그러니 셋이서 함께 한 노래를 부르면 모두 자기의 스타일을 고집하므로 노래가 산으로 갔습니다. 찬불가도 되었다가, 뽕짝도 되었다가..... 

어쨌든 회합장소로는 거의 존재자체가 유명무실했던 청양군 문화원 건물의 강당을 사용하였습니다 (청양은 군청 소재지입니다). 문화원장님은 집안끼리도 잘 아는 분으로, 일단은 우리의 활동계획을 지원해 주셨네요. 

그렇게 한동안을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던 모임을 드디어 시작하기로 한날..... 

다음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