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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며 사는 세상

무료 디자인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그래픽디자이너 김선생

오늘도 뜻하지 않게 광고 나가겠네요. 상업광고는 아니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늘 그렇듯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성장소설같이 될것같은 예감이...ㅠㅠ

어린날의 동화
1978년의 일입니다. 저는 충청남도의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은 시골뜨기였습니다. 이사와서 정착한 곳은 은평구의 (예전에는 서대문구) 신사동이라는 곳으로 소풍지로 인기있던 서오릉이라는 곳과 가까운 지역이었지요. 아주 소박하기만한 동네였지만 촌뜨기에게는 으리으리해보이기도 했고, 또 그래도 나름 크게 주눅들지 않고 적응할만한 곳이었네요. 집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가 찻길로 들어서면 너무 너무 평이하여 정말 이 이름이 맞을까 하는 정류장 이름이 나옵니다. 바로 "가게앞"이라는 버스정류장이 있었지요. 그곳에는 을지로에서 순회하는 150번, 152번 그리고 상도동에 가는 143번 세 번호의 버스가 섰습니다. 그 아래로 다시 내려가면 제가 다니던 역촌국민 (초등) 학교가 있습니다. 걷기에 그리 크게 부담되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우리집이 있던 골목에는 연립주택, 주택들이 주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 다음 골목에 가면 그 당시로는 정말 눈이 튀어나오게 좋은 집들이 있는 골목이 나옵니다. 골목하나차이로 별세계같았던 동네지요. 

아직 사투리도 제대로 고쳐지지 않은 시기에 5학년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고, 서예를 가르치시던 담임선생님을 맞아 서울생활과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봐도 "서울아이" 이렇게 써있는 얼굴이 하얗던 한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다니다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와 함께 다니며 친해진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암튼, 그 친구는 우리집이 있던 골목의 다음 골목에 살았습니다. 네! 으리으리..ㅎㅎㅎ

집에 가보니 작은 연립이었던 우리집과는 정말 비교자체가 안되더군요. 그 당시 아이들에겐 자전거가 보물같은 존재였는데, 쵸쿰 여유가 없던 집사정에 전 자전거는 엄두도 못내고 있었던 시절... 그 친구는 오토바이바퀴같은 것이 달린 외국제 자전거를... 아! 부럽부럽.... 1978년의 일입니다. MTB같은 말도 없었을때고... 나중에 알고보니 가족과 함께 미국에 살다 왔다네요. 그 친구가 보여주는 사진첩은 정말 꿈과 같은 세계였습니다. 30년도 넘은 지금까지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진은 길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노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래..." 하던..... 나중에 제 딸아이도 그러고 놀더군요. 암튼... 

그 당시 둘이다 열광하던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해부...... 네! 그 해부입니다. 학교에서 개구리 해부 같은걸 하고 할때인데, 전 학교문방구에서 산 조악한 해부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친구는 정말 제대로 된 외제 해부기 셋트를 가지고 있었지요. 쥐같은건 못하고 주로 개구리 해부였고, 또 사실은 실제로 해부보다는 해부기 셋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악동시절입니다. 둘이서 150번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끔 우리만의 모험을 떠나곤 하였습니다. "오라이!" 하던 버스 안내양 누나가 있던 시절이고.... 서대문 돌아 광화문 지나고 을지로를 돌아 가서 미도파 (지금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는 다시 돌아가는 순환버스였습니다. 미도파앞에서 내려서는 근처의 백화점을 순례하며 독일제 해부기 셋트를 구경하는 것이 일이었지요. 근처에서 일하시던 친구의 어머니가 백화점 지하의 식당가에서 맛난음식을 사주시던 기억도 선명하게 남아있네요. 그렇게 1년을 매일처럼 붙어 다녔는데, 6학년이 되기전으로 기억하는데 그 친구가 이사를 가게 되며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어딘가라고 하였지만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린 거죠. 정말 슬펐습니다. 1년을 그렇게 붙어 다니던 친구가 없어졌으니 상실감이 컸던거죠. 

(저는 어디에 있을까~~요? ㅎㅎ)

평온한 6학년을 보내고 근처의 중학교에 진학을 하였지요. 그렇게 1980년대를 맞았습니다. 중학 1학년을 마친 싯점에서 우리집도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였고, 2학년초에 결국은 이름도 생소했던 잠실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잠실은 뽕밭이라고 놀리던 곳이고 아파트도 많이 있었지만, 미개발된 나지나 밭이 더 많았던 곳입니다. 암튼, 그렇게 서울의 서북쪽 끝에서 강을 넘어 동남쪽끝으로 멀리멀리 가게 되었습니다. 개발이 덜 되었다고는 하나 원래 살던 곳과는 비교가 안되는 동네였지요. 중학교 2학년에 전학을 하였고, 또 다시 적응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다들 조금더 서울아이들같은 그런...... 어느날 그때 한참 유행하던 류빅스 큐브 대회가 열렸습니다. 각반의 챔피언들이 모여 겨루는 그런 자리였던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아... 네! 그친구가 있더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2년이 조금 넘어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지만 가장 친했던 친구를 못알아볼리가 없죠. 정말 반가왔습니다. 

그런데....이상하게 둘다 학교에 다니던 2년동안 별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데면데면한채 각자의 생활을 하게 되더라구요. 참 이상하죠? 또 그렇게 졸업하고.....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라는 생각만 하게 되었네요. 고등학교도 따로 가게되었으니 그 이후의 소식은 모르죠. 


어른이 되기에는......
세월은 그 뒤로 한참을 흘렀고 (20년정도), 전 저 나름대로 바쁘게 생활하며 일본거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한참 아이러브스쿨이 유행할때인데 갑작스런 이메일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네요. 바로 그 친구입니다. 전 등록만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동창명단에서 제 이름을 발견하고 이메일을 보냈더라구요. 전화통화도 하고... 그때는 예전의 서먹했던 것은 없어지고 다시 초등학교때같이 스스럼없이 대화가 되었습니다. 모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CF감독을 거쳐 사업을 하고 있노라 하던 친구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하는 마음을 갖게 되더군요. 물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라서 너무나도 반갑기도 했구요. 그러다 또 다시 한참이나 연락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약 4-5년쯤.... 

그러다 받은 이메일에서 다시 허허로와진 친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려움을 잘 모르는 친구일텐데, 갑작스레 닥친 어려움에 너무 힘겨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계속 신경이 쓰일 정도더군요. 나중에 보니 제가 생각했던것보다도 훨~씬 심한 고생을 하였더군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좋은 모습으로 일어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종교에도 더욱 마음을 쏟으며 잔잔한 일상을 영위해나가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더라구요. 사실 돈도 많이 벌어보았을테고, 조직의 정점에도 서보고 했던 친구....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감성이 넘쳐서 늘 그 창의성을 발산하는 일을 해왔던 친구가 선택한 일이 바로 그래픽 디자인입니다. 물론, 어느날 갑자기 시작한 일은 아니겠죠? 하고 싶다고 금방  되는 일도 아니구요. ㅎㅎㅎ 사실은 저도 그즈음 정말 커다란 일이 있어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서로를 보며 위로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던것 같습니다. 

네! 그 친구가 바로 Josua Found의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이너 김선생" 이랍니다. 
제 블로그 아이콘, 그리고 블로그 헤드를 만들어 주었죠. 물론, 개별 디자인 외에 캐릭터 디자인등도 하고 있습니다. 저 옆에 보면 아주 예쁜 컵독 캐릭터가 있죠? 네! 암튼, 전 개인 그래픽 디자이너를 가진 셈입니다. 하하하. 래복이라는 글을 한자로 하여 한자부수를 옷걸이 형태로 만들수 있는 저 창의성은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단 댓글의 블로그 로고를 보고 멋지다하여 들어오시는 분들도 계실정도입니다.


Designer's Obilge (디자이너스 오블리쥬)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이 있죠. 사전적으로는 귀족의 의무라는 말로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암튼, 디자이너 김선생... 많은 것을 가져보고 또 가지려 노력하던 친구, 가진것과 가지려 했던 것들을 잃고 또 그 이외에 더 많은 것을 잃어 본 친구라서 그 이후의 행보는 참 주목할만 합니다. 요즘은 돈되는 일보다 돈 안되는 일에 더 몰두하네요. 미쳤죠. ㅎㅎㅎ 한동안 여러가지 공익디자인에 주목하더니 요즘에는 기어이 사고 하나를 또 쳤습니다. 바로 위에 말한 디자이너스 오블리제라는 사업..... 


기업의 혹은 단체의 얼굴같은 것이 바로 로고나 배너 디자인이 아닐까 합니다. 짧지만 의미있는 디자인은 강한 인상을 주며 곧바로 연상작용을 할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기업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기업의 로고를 정하거나 바꾸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픽 디자인이라 하면 어렵게 생각하는 또 무척이나 비쌀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작은 변화를 가져왔으면 하는 바램과, 또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나눔을 실천하고픈 마음으로 시작한 일종의 캠페인이네요. 형편이 어려운 기업이나 개인에게 기업로고, 배너 등의 디자인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당찬 사업입니다. 물론, 전문 디자이너인데 마냥 무료는 아니구요.... 기업이나 개인이 취급하는 상품이나 서비스 혹은 다른 형태를 제공해주시면 제공자와 Joshua Found의 이름으로 필요로 하는 곳에 기부를 하는, 생각해보면 아주 아주 비싼 디자인이랍니다. 마음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반드시 금전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겠죠? 그 형태는 절대로 한가지에 국한되지 않고 협의에 의하여 결정할수 있을듯 합니다. 혹시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시거나 small business하시는 분들중 소비자에게 먼저 이미지를 제공할수 있는 로고나 배너의 디자인을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Joshua Found에 의뢰해 보시면 어떨까요? 혹은 봉사단체라거나 공공성이 있는 단체의 로고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런 단체의 경우 하는 일자체가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것이 되므로 다른 조건없이 기쁘게 받아줄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김선생은 디자이너로서의 사회적의무를 다 하고 또 의뢰하시는 분도 자신이 제공할수 있는 형태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수 있는 아주 좋은 형태의 기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먼저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당사자인 김선생의 이야기를 듣는게 나을듯 하여 배경과 신청요령 그리고 첫번째 사례 이야기를 링크해보겠습니다.  


디자이너스 오블리제 배경


 

디자이너스 오블리제 신청요령


 

디자이너스 오블리제 첫번째 이야기(사례)



너무나 좋은 이야기라서 진작부터 제 블로그의 나누며 사는 세상에 소개하려 했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제서야 올리게 되네요. 좋은 사업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또 광고로고를 블로그 사이드바에 올립니다. 조옆에 위에 보이는것 과 같은 디자이너스 오블리제 배너 보이시죠? 요즘 제가 광고에 심취하게 됩니다. ㅎㅎㅎ   

그리고, 혹시 주위에 필요하신 분이 계시다면 적극적으로 소개를 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아주 작은 실천이지만, 작은 것이 모여 커다란 물줄기로 커나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전에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을만큼 이런일은 조용히 행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생각들이 많이 바뀌게 된것 같습니다. 이런일이 자극이 되어 다른 분들이 참여하게도 되고, 분야가 달라도 다른 형태로 재생산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 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장훈씨도 그런말을 했더라구요. 기부가 전염이 되었으면 한다는 그런 취지의 말이었습니다만..... 

예를 들면...음.... 저같은 경우라도..... 흠.... Guitarist's Oblige의 일환으루다가 골방기타교실 같은.... 네! 아니라구요. 알겠습니다. 닥치겠습니다. ㅠㅠ 


잡담
지금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의 우리의 부모님 연세보다도 더 나이를 먹게 되었습니다. 독일제 해부기에 초롱거리던 눈에은 둘다 노안이 왔고, 거의 데스크에 앉아 있는 일인지라 전화할때마다 누가누가 뼈마디가 더 쑤시는지 경쟁을 하곤 합니다. ㅎㅎㅎ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고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요. 그리 긴 인생은 아니지만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도 겪으며 지금까지 애둘러 오게 되었습니다. 아주 젊은 패기와 도전의 시절은 이미 지났지만 이렇게 사회를 이야기하고 할 나이가 되어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주 좋습니다. 눈치채신분 계시겠지만, 사실 김선생과 저 얼굴맞대고 만난건....30년전입니다. ㅎㅎㅎ 그래도 요즘은 페이스북으로 블로그로 이메일로 또 전화질로 자주 대화를 나누고 있죠. 디자이너보다는 그림쟁이라 불리우길 바라는 사람이죠. 암튼, 이 디자이너스 오블리제 말고도 일단 제 이웃분들부터 블로그의 파비콘으로도 쓰일수 있는 로고와 헤더작업을 해준다고 하였으니 필요하신분들은 꼭 말씀해주시길....

아! 저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전 지금도 해부하며 사는 직업 (?) 인데, 세속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소인배인지라 해부도구는 늘 가장 비싼것을 구입합니다. ㅎㅎ 티타늄 합금 뭐 이런거죠. 골프채도 아닌것이... ㅎㅎㅎㅎㅎ 아마 그게 참 부러웠던가 봅니다. 이상하게 다른건 잘 모르겠는데 해부도구만큼은 정말 좋은것들을 사게 되더라구요. 번쩍번쩍하는 티타늄 해부도구를 사고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서 웃곤 합니다.

암튼, 이 사업 잘되어 우리 그림쟁이 사업성공하게 되길 진시으로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