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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작가 김영하 - 그의 어린시절 구라빨이야기

                                             (사진은 www.mimul.com에 속합니다)

위키에 보면 우리의 작가 김영하 선생을 이렇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196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고장을 옮겨 다니며 성장하다가 1980년부터 서울에 정착하였다. 잠실의 신천중학교와 잠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경영학과에 입학하여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작가로서의 경력 1995년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계간 《리뷰》에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96년 장편《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에는 단편집 <호출>, 1999년에 역시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2001년, 아랑 전설을 현대적으로 차용한 장편 <아랑은 왜>를 출간하였고 2003년, 과테말라와 멕시코를 다녀온 후, 장편 《검은 꽃》을 발표하였다. 근대 초기의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은 출간 당시부터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해말 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였고 이듬해에는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4년 한 해, 김영하는 장편 《검은 꽃》으로 동인문학상,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로 이상문학상, 단편 <보물선>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한 작가에게 상을 몰아주지 않는 한국 문단의 관례에 비추어볼 때 이례적인 사건이었으며 '문학계의 그랜드슬램'으로 불렸다. 그해 김영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갑자기 귀환 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의 하루를 그린 장편 《빛의 제국》을 출간하였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장편 《퀴즈쇼》를 발표하였다. 《퀴즈쇼》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김영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저 화려한 경력.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재기발랄함과 엉뚱한듯 하면서도 올곧게 가는 맥락. 문학동네 작가상을 시작으로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그리고 황순원 문학상까지..... 문학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작가로, 또 방송 진행자로 혹은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엄청난 변신을 거듭해온 작가 김영하. 

이렇게 점잖게 앉아 사진발을 즐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저 위에 저 잠실의 신천중학교와 잠실고등학교가 제 모교지요. 결국은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는.....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때 보다 중학시절에 참 친한사이였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김영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고 말할수 있을것 같네요. ㅎㅎㅎ

흔히 예술가나 연예인등 예인들의 어린시절은, 가끔 예외는 있지만  "아 어릴때부터 끼가 있었군" 하는 그러면 그렇지 식의 끄덕임이 있지요. 김영하의 어린시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학교다닐때 보면 "저 친구 참 명물이네" 하는 친구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는 못하시는 선생님들도 다 알만큼의 명물...... 수업시간에 거의 눈을 뜨지 않는 완벽한 인간 어뢰였는데, 자기 짝이 호명되어 일어났다 앉으려면 선생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확빼거나, 그 당시 남학생들이 잘 하는 체육시간에 바지 기냥 확벗기기 등등이 전문이었던......

이 친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간혹 코주위가 까맣게 하고 돌아다닙니다. 몇번은 민망할까봐 그냥 넘아가다 너무 궁금하여 물으니 코를 풀었다며 자신의 전용 코종이를 보여줍니다. 신문을 반듯하게 자른 사각종이를 늘 가방에 넣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뭐 1980년초라도 다들 작은티슈는 가지고 다니던 시기였는데, 그런 깔끔한 생활자세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는듯한 기행이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코주위가 까만게 아니라 뻘겋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당근 물었죠. 어떻게 된거냐고 하니 "응! 스포츠신문으로 풀었더니......" ㅋㅋㅋㅋ 당시는 프로야구가 출범을 하고 스포츠 신문이 창간이 되었던 시기입니다. 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못하여 신문도 잉크가 까맣게 묻어나곤 하였는데, 신문에 처음 컬러잉크를 사용하였던 스포츠신문은 컬러잉크도 많이 묻어났습니다. 그래서 코가 그리 뻘겋게 변한...... 암튼 명물이었습니다. 

어느 쉬는 시간 심각한 얼굴로 단상에 나간 영하군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잠시 주목! 하더니.... "최전방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최후방으로 전출을 가시게 되서, 가족들이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간 여러분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정말 서운하기가 이루말할수 없네요, 전 다음주에 전학을 갑니다" 라는 선언을 하는 거였습니다. 영하아버님이 군인이신것은 다 알고 있던 터라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지요. 워낙 명물친구였고 다들 서운한 마음에 아끼던 미제볼펜이며, 일제 샤프를 선물로 주고, 점심시간에는 매점에서 빵까지 사다가 푸짐하게 먹이고 (?) 하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다음주..... 버젓이 등교하는 영하를 보며 그냥 고개만 갸우뚱하던 우리들에게..... "응, 너희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군대라는데가 말야 가라면 가고 그냥 있으라면 있어야 하거든. 갑자기 또 그냥 있으라 한다고 해서 전출안가시게 되었다네"  어리버리 우리들이야 뭐 "정말 다행이다. 전학안가도 되는거네" 어쩌구 하면서 그의 잔류를 기뻐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준 볼펜같은거 다시 달라기도 치사하고 해서리..... 

물론 뻥이지요. 수개월후에 다시한번 전학소동을 벌여 두배의 볼펜과 연습장을 챙긴후에야 멈춘 그 친구의 전학구라. 

한번은 또 앞에 나가서는 "내 친구의 여자친구 아버지가 환경미화원이신데, 새벽에 청소를 하시다가 차에 치여서 많이 다치시는 바람에 입원을 하시고..." 말인 즉슨, 자신의 친구의 여자친구는 학교를 그만둘 위기에 처했다 뭐 이런.... 어리버리 우리는 "애구, 저걸 어째" 끌탕을 하며 100원 200원씩이라도 걷어 보태자는데 합의하였고....... 영하는 이상하게 그런 친구들이 많다는데 의구심을 가졌어야 했는데....어느날은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의 어머니가 또 어느날은 아버지 부대의 이등병이, 암에 걸리고 부러지고...... 결코 한다리로는 확인이 안되는 2단계 이상 아는 사람을 거론하는 치밀함. 

이상한건 그런 거사 이후엔 항상 매점구석에서 단팥빵을 볼따구 미어터지게 밀어넣는 영하를 목격하였다는 제보가 들어오곤 하였지요. 더욱 이상한건 전학구라가 되었든 교통사고 구라가 되었든 한번 속으면 다시는 걸려들지 말아야 하는건데, 이상하게 영하가 앞에만 서면 걸려든다는 거죠. 앞에 서면 "흥! 요번엔 뭐라하나 들어나 볼까? 우리가 바보야, 또 속게?" 이랬는데, 실실 웃으며 듣는 사이에 동전지갑이라도 열게 된다는 바로 그 구라대마왕의 황금구라빨!!!!! 

"귀신은 뭐해, 저거 안잡아가고" 했던 그때의 빵값깨나 뜯기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영하에 얽힌 에피소드는 끝이 없습니다. 어린마음에도 "저 인간은 잘 되면 연예인이고, 못되면 사기꾼이다" 라고 평가하곤 했었지요. 별명도 그런 연유로 원래 그의 것이었던 생김새에서 유래한 "혹성탈출" 에서 "뻥하" 로 바뀌게 되었지요. 

솔직히 서울뺀질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학생이라도 뭐 순박과는 거리가 먼 잠실아이들이었고, 대개 그당시의 중학구라라고 하면 "우리집에 xxxx있다" 나 "어제 xx여중애들하고..." 뭐 이런 수준이었건만, 영하의 구라는 무언가 스토리가 있고 감동이 있으며 인간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기승전결을 다 갖추고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작가로서의 그를 있게 한것도 이 전학, 교통사고 구라에서 비롯된것은 아니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그때의 어리버리 친구들은 최초의 독자엿던 셈인가요? 사실 어딘가의 기사에서도 보았는데, 늘 전방지역으로 다니시던 어버지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고 하며 놀았다고 하니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  "지금의 김영하를 만든건 8할이 구라 (픽션) 였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그의 방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잘 알고 있기에 처음 그가 문학동네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한 스포트를 받았을때도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속으로 "다행이다, 사기쪽으로 안간게..." 했던 기억이 ㅎㅎㅎㅎㅎ 구라빨이 세다보니 글빨도 셀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번 갔던 볼링장에 아버님과 함께 볼링을 하러 온 영하를 봤던 건 대학을 들어가서였지요. 전학구라에도 등장하곤 하셨던 아버님은 전역을 하셨다고 하여 조금 웃었던 기억도 나네요.  

가장 최근에 영하를 보았던건 (최근이라 하기에는.... 좀) 20여년전인 대학교 2학년쯤. 음주후의 늦은귀가길,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도 끝무렵에서 구슬프면서도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왠 도인 하나가 커다란 퉁소를 불고 있는겁니다. 취한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바로 우리의 김영하군. 써클활동으로 전통음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느긋하게 감상을 하며 오랜만에 만낫으니 수다라도 떨자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글쎄 이 사람이 눈도 안뜨고 계속 퉁소만 불더라는..... 조금 울화가 치밀기도 하여 사소한 복수를 결심, 100원짜리 동전을 앞에 떨구고 냅다 돌아섰습니다. 

우하하하하!!! 따식..... 하다가 문득 들게 된 생각. "허걱! 또 100원 뜯겼네???" 이젠 구라도 안치고 뜯어내는구나 하는...ㅋㅋㅋㅋ 

사실 그의 책은 1권을 빼고는 읽지 못했습니다. 굴비낚시라는 영화관련 산문집. 사진관살인사건이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정도를 드라마화한 프로그램을 보았을뿐이네요. 이번 주말에는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검은꽃이라도 읽어볼까요?

암튼, 아직도 차고 넘칠 그의 이야기주머니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영하야! 유명해졌다고 쌩까냐? 4년전에 보낸 이메일 답장 안하면 내 폭로 보따리도 쬐금 아주 쬐금 더 여는 수가 있다는거......ㅋㅋㅋㅋㅋ" 


추기) 오! 유명인 친구 시리즈 생각보다 잼있네요.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세계최초의 온라인 게임이라는 바람의 나라를 만든 넥슨의 김이사를 함 후벼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