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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12 - 재능없음을 탄하며 음악의 꿈을 접다

그렇게 꿈만 같던 1년반의 공무원(?) 생활.....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1년반이라는 공백후 서울에 뚝 떨어진 저는 이유모를 공포감마저 느꼈네요. 그 사이 한층 성숙해져 보이는 친구들, 만나면 나도 잘 모를 소리들을 지껄여대었고, 빠다냄새나는 서울말을 듣는게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시골에선 갓 상경한 저와는 많은 거리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간 시골에서 한 일이라고는 충실한 출퇴근과 나라지킴이 생활, 나름의 음악생활이었는데, 이 친구들은 방위를 받으면서도 저녁에는 영어학원이다 뭐다 자기계발에 충실한 나날들을 보냈더군요. 그전에는 그토록 붙어 다니던 친구들이었는데도....... 

사실, 제가 이번 시리즈로 음악, 기타이야기만 해서 그렇지만.... 저에겐 목표라는 것이 있었고, 그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수업없던 대학1-2학년 시절, 음악에도 미쳤었지만 정말 죽어라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입학시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전공이 생물공학이라서 보다 발전한 일본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 먼저였지만, 일본정부에서 초청하는 국비유학제도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암튼, 서울에 올라오니 또 서울대로의 생활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복학까지는 8개월 가량의 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새벽에 일어나 전철에 끄덕이며 가서는  종로의 학원가를 전전하였고, 아침은 그저 간단히 해결하고는 남영동의 통역학원이라는 곳도 다니며 하루종일 일본어와 또 약간의 전공과 씨름 해야 했습니다. 전공은 배운적도 없으니 그저 책만 읽었다는...ㅠㅠ 그나마 방위로 시골에 있는동안 여러가지로 바쁘기는 했지만 일본어 책도 번역하는 등 나름대로 머리는 놀리지 않고 있었기에 그래도 빨리 적응할수 있었네요. 

오후가 되면 학교도서관에 들러 다시 공부를 하고 (정말 모범생이죠?)....초저녁에는 과외아르바이트 그리고 늦은 저녁에는 밥통 (기타) 을 들고, 명일동 레스토랑으로 방배동 카페골목으로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끝나는 시간은 밤이 늦었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밥통을 끌어안고 버스를 타면 항상 취객의 술냄새가 진동하고, 함께 탄 어른들은 곱지않은 시선으로 절 보곤 했습니다. 술 한잔 안마시고 불량 학생취급을 당해야 했는데, “아니예요! 이거 밥벌이예요”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네요, 너무 지쳐서..... 그래도 집에 오고 나면 또 한시간 이상은 일본위성방송을 청취하며 꾸준한 감각을 길러나가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거의 슈퍼맨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꾸준히 술도 마셔주며 간에도 비상을 걸어주시는 센스... ㅎㅎ 

그렇게 한학기를 학생도 아닌 일반인도 아닌 또 가수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마치고 복학이란걸 하게 되었습니다. 

복학한 학교엔 더 이상 최루탄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편한 곳도 되지 못했습니다. 소위 전공공부라는걸 처음으로 하기 시작하여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으며, 입대전에 몸담았던 써클에선 대선배 취급을 해서 또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들 그런것처럼 야전잠바 하나 걸치고는 인생 다 산것처럼 삐닥하게 걸어다니던 시기네요. 그런데, 새로 부임한 교수님이 새 연구실을 개설한다고 하기에 일착으로 등록을 하였고, 매일 매일 새로운 실험과 교수님께서 진행 중이던 책 번역을 넘겨받아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복학을 하고 부터는 오랜 밥벌이는 걷어 치웁니다. 복학을 하고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복학을 하였습니다. 써클 동기로, 엄청난 실력으로 압도하던 김영국이란 친구입니다. 중학교 2학년부터 작곡을 하였다던.... 그러나 왠지 무척이나 우울하고 늘 죽음같은것들을 이야기하던 예술가입니다. 
(관련글 <------- 클릭) 

군악대에서 복무하고 복학한 이 친구는 놀랍게도 변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고 삐딱하기만 하던 친구가 실없는 농담을 달고 살며 주위 친구들과 무척이나 잘 지내며 나 몰라라 하던 서클에도 상당한 열정으로 활동을 하더군요. 사실 1,2학년에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었지만, 복학하고 부터는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상당히 친해졌지요. 그때쯤은 써클도 틀이 잡히고 실력이 출중한 후배들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후배들이 대학에서 주최하는 가요제등에 나가 심심치 않게 상을 받아 오더군요. 뭐 그러다가는 영국이가 심심풀이로 가요제에 나가보자고 합니다. 그때는 대학단위로 방송부에서 주최하는 가요제가 유행을 했답니다. 사실 그때 써클에 기타가 필요하다고 하여 아무래도 선배들이 좀 장만해주는게 어떨가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했거든요. 그래서 오로지 기타값이라도 벌려고 그냥 나갔습니다. 그해 두개의 가요제에 나가서 둘다 대상을 받았습니다. 써클선배님이 작곡한 곡으로 나게게 되었지요. 곡은 이렇습니다. 


가운데 삼각형 클릭하셔야 나와요.

다음해에는 같은 대학들에 전년도 대상 수상자로서 축하무대를 하게 되었구요. 암튼, 그렇게 해서 기타를 여러개 기증하였지요. 우리 학교에서 하는 가요제에는 창피하여 안나가고 후배들을 내보냈습니다. 암튼, 그때 당시에 여러 가요제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몇해뒤에 데뷔를 하고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걸 보고는 감개무량하더군요. 그해, 또 이듬해 우리 써클에서 쓸어온 트로피가.... 축하무대에서는 대개 두곡을 합니다 나머지 한곡은.....

가운데 삼각형 클릭하셔야 나와요.

이렇게 나름 잘 나가게 되었습니다. 음반취입이야기도 나왔고....영국이는 무척 관심있어 했고, 저는 시큰둥했지만.... 솔직히 솔깃했죠. 그 싯점에서 진로라는 걸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습니다 ㅋㅋㅋ) 

과연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하면 잘할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옆에 있는 영국이라는 친구를 보니 제가 가진 음악에 대한 실력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랜 고민끝에 "그래 음악은 이런 친구들이 해야 하는거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아주 말끔하게 완벽하게 접었습니다. 프로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 재수없다는...... 해마다 대입수석을 한 학생이 "교과서에 충실하였구요, 수업을 열심히...."  라는 가장 재수없는 멘트에 이어 두번째로 재수없다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가 되어버린겁니다. ㅋㅋㅋ 음악을 빼고 나니 할줄 아는거라고는 공부밖에는..... 

복학하고부터 시작한 연구실에서의 실험도 비교적 잘 진행이 되고 있었고, 사실 몇년간을 일본어만 죽어라 팠더니 뚫려버린 귀.... 그간 진행했던 책번역등등으로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어학의 기본이 전부 일통이 되어버렸답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죽어라 했지요. ㅋㅋ  그때부터는 일본어 전공책도 문제없고, TV를 봐도 거의 대부분 이해를 할 수준이 되었네요.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당시 처음으로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여권내기도 힘들었었는데, 이젠 아무나 외국으로 여행을 갈 여건이 된겁니다. 그래서 저도 바~로....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갑니다. 15일의 여행동안 그다지 언어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만큼 대학 4학년에는 무척이나 자유로왔답니다. 그래서, 일본어는 잡고 전공만을 다시 팝니다. (갑자기 나의 기타 이야기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가 되어가는 느낌이..). 


암튼, 음악이 이제 점차 제 인생에서 무척이나 부수적인 것이 되어는데......... 

그 당시 과 조교를 하던 82학번의 형이 있었는데, 방위 가기전에도 잘은 몰랐지만, 가끔씩 이야기도 하곤 하던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의 생활자세가 남다른데가 있어 다른 사람의 존경을 살만한 곳이 많았답니다.  왜 말과 행동이 너무 일치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형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아무도 컨닝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할정도 였습니다, 괜히 미안해져서..... 한번 누군가가 컨닝을 하다그 형에게 적발이 되었는데, 그 형은 꾸짖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세상의 이치 이야기와 함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주시더랍니다. 사실 그 이후에는 정말 컨닝이 사라졌습니다. 그 형은 바로 백 광현 마르첼로형이었습니다. 백광현 형과 저는 그저 그렇게 학과의 선배와 후배였습니다. 간혹 그 형이 학과사무실에 기타를 가져오시기에 장난삼아 (?) 한곡을 들려드렸더니, 종교가 뭐냐고 하십니다. 천주교라고 했더니, 한참을 생각하신 후, 구의동 성당에 새로운 노래패를 만들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꺼내 놓으셨습니다. 성가대와는 다른, 생활성가를 주축으로 활동하는 단체를 만들어 좀 더 친숙하게 청년들이 결속할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지요. 사실 제 본당은 잠실이었고, 그곳에는 어릴적 부터의 친구들이 많아 다른 성당에서 활동을 한다는게 조금은 망설여졌습니다. 그저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모면했네요. 며칠후 밤 8시쯤 광현형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시간있으면 잠시 나오라고......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그냥 체육복차림에 집을 나섰고, 찾아간 곳에는 그때 보좌신부님이였던 유신부님을 비롯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신고식이었던가? 그제서야 일이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걸 깨달았네요. 이른바 포섭 (?)이 된 거였답니다. 그것도 깊숙하게..... 그곳에서 전 츄리닝 차림에 노래를 해야했고...... 물론 그런일에는 익숙한 전 여러곡을 불렀던것 같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연구실로 첨 듣는 목소리의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뒷이야기...
고독한 예술가였던 김영국이라는 친구는 그 뒤로 함께 음악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quartet을 결성하였습니다. 노래그림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두어장 내었고, 성공적으로 (?) 가요계에 입성하였으나 가수로서는 그리 큰 인기는 얻지 못합니다. 그룹이 깨지며 솔로가수로 전향하게 되었고, 용하다는 역술인이에게 의뢰 가요계에서 뜰 이름을 점지 받았습니다. 그러다 뛰어난 작곡실력으로 곡을 다른 가수에게 주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안치환의 "내가 만일" 이라는 곡을 작곡하여 작곡가로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 이름이 김범수입니다. 그런데...허걱..이 이름으로 작곡활동을 시작하고 '내가 만일'도 이 이름으로 나왔건만..... 난데없이 김범수라는 가수가 나와 확떠버린겁니다. 이런 된장!!! 암튼, 그 이후 그 친구는 이름을 지어준 점쟁이를 원망하며 수없는 소줏잔을 기울였습니다. 

그래도 작곡가로서는 좋은곡들을 쓰다가, 1995년 양희은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며 자신의 곡으로 한 음반을 채웁니다. 이 음반 이후, 영국군은 양희은의 음악동반자가 되었고, 현재도 함께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양희은의 곡인 당신만 있어준다면도 이 친구의 작품입니다.


백광현 마르첼로 형은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으면서도 학과지에 유전공학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 교수님들의 미움을...  암튼, 대학원졸업후 뜻한바 있어 수도원에 들어가 조용한 수도생활을 하다가, 아주 늦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신부서품을 받으셨고. 귀국후 지금은 청소년사목을 열심히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저와는 연락이 끊어져 안타가와 하다가, 지난주에 극적으로 연락이 닿았습니다. 지금은 살레지오 수도회 소속의 청소년 사목연구소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