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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13 - 아! 음악은 이제 그만..... 응?

앞의 이야기들.....

구의동 성당에서 온 사람이라더군요. 광현이형이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던가......  그래서 또 아무 생각없이 학교앞 약속장소로 나갔더니, 그곳에 물론 첨 보는 사람이 있었고, 관등성명을 대고 호구조사하고 하다보니 동갑내기였고 곧바로 의기투합 바로 술을 마시며, 그저 술기운에 그전엔  한 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는 생활성가 청년단체의 발족위원이 되어버렸습니다. ㅠㅠ  그것도 다른 본당. 그 친구는 바로 남기영이라는 친구입니다.     


몽롱한 술기운에 나눈 대화들이어서 조금은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나중에 따로 만나 조금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땐 막 새 성전을 건립중이었고, 옛 성당에서 일부 이사를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새 성전은 사실 완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성당내부는 콘크리트오 철근이가 바로 보이는 수준이어서 미사중 비라도 오면 그 비가 거의 다 성당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연습실은 공사 관리 사무소의 콘테이너에서 시작했네요. 저와 기영이 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둘.... 그렇게 넷으로 노래나무라는 성당내 단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젠 음악활동은 안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이상하게 꼬여들어가며 다시 시작한 활동이 사실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습니다. 

암튼, 첫 연습날...... 다른 두 단원이었던 정원이와 현연이까지 모였습니다. 우선은 가벼운 노래로 목을 풀고 가기로 했는데, 아마도 징검다리의 “님에게...”라는 곡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두 함께 부르고 난 후, 저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났습니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면서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미리 이야기하자면, 셋다 음악에 대한 감각이 무척이나 뛰어나고, 피아노나 플룻등악기도 다들 다룰 줄 알며 나름대로 성가대에서 활동해온 사람들이라서 곡의 해석능력이 무척이나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일부러 화음을 일일이 지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파트를 찾아 부를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은데, 그들이 그랬습니다. 네 셋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식은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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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성이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태어나서 이제껏 성가만을 부르던 (들려주기 위한 노래) 사람들이라서 완전히 성가 발성이었지요. 그러니, 징검다리의 “님에게....” 가 성가가 되어버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 부르고 나서는 “아멘” 할 뻔했으니 말 다했죠. 물론, 취지 자체는 생활성가를 보급한다는 거지만, 형식이 성가대와 같다면 굳이 노래나무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저의 생각이었고, 어떻게든 노래나무의 소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주일 한 번의 연습으로는 택도 없었고, 단원모집이 시급하다는게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연습해도 다들성가였다는.... ㅠㅠ 

마침 청년피정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노래나무의 홍보를 하면 좋을것 같다는 의견이 나외서 피정에 맞추어 작은 두세곡의 공연연습을 시작하였습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실험실에 매달려 실험만 하고 있던 저는 피정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 피정은 침묵 피정이었는데, 1박2일동안 기도와 묵상만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갖는 피정이었지요. 대신 피정이 끝난 후 합류하여 피정의 집에서 두어시간의 여흥을 제가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이 끝나면 노래나무의 정식 출범을 알리며 작은 공연을 갖는게 계획이었지요. 물어물어 의정부 수련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많은 낯선 이들이 있었고, 외부 초청 레크리에이션 강사였던 저는 그간의 딴따라 생활로 쌓아둔 내공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갔고, 침묵피정 뒤라서 참가자들에게 약간의 해방감도 있어 다들 별거 아닌것에도 잘 따라주었고 즐거워 해주어 저자신도 많이 즐기며 끝냈습니다. 그 뒤는 노래나무 홍보공연..... 과연 잘 할수 있을까하는 불안감, 이 공연으로 신입단원을 모을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등으로 무척이나 떨렸더랬지요. 참고로 전 원래 대중앞에서 잘 안 떤답니다. 

정통성가가 아닌 가요풍의 노래들을 준비했기에 의외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김민기의 날개만 있다면과 몇몇 다른곡들 이었던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한 신입단원을 거의 억지로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잘해준다고 꼬셔서....... 자기는 노래보다는 미술에 장기가 있다며 무대 소품이나 포스터요원으로 써주셔요 하는 수줍은 자기소개 하나로 만장일치 입단이 결정되었습니다.  미쓰홍입니다. 그 뒤로는 순풍에 돛 단듯 노래나무는 쑥쑥 자라 나갔습니다. 성당내의 재능있는 인재들은 거의 다 노래나무로 들어올만큼 혁신적인 모임이 되어갔고, 대개 젊은분인 보좌신부님들은 부임하시면 가장 열성적인 팬이 되어주셨지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노래나무에 큰 애착은 못갖고 있었고 마냥 낯선 풍토에 조금 겉도는 느낌이 있어 일요일저녁 청년미사 후에 자연스레 연결되던 뒷풀이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대단한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실험실 생활이 있어 부담이 된 것도 사실이며, 또 그러다 정들어 시간이 흘러 제가 그곳을 나와야 할때 많은 미련이 남을까 두려웠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뒷풀이 권유를 냉정하게 뿌리치는 날이 계속되었고, 아마도 노래나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단체사람들도 저를 그리 좋지 않은 눈으로 보던 것도 사실이네요. 전 그냥 일이라 보고 싶었고.... 그래서 사실은 그리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여러번의 부딪힘이 있었고, 천성이 사실은 사람을 좋아해서 저도 모르게 구의동성당과 노래나무에 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재능있는 후배들은 계속들어왔고, 비성가계열의 목소리들도 발굴하여 그제서야 노래나무의 색깔을 낼수 있게 되었네요.  그땐 대학원준비다, 또 유학준비다 해서 정신이 없을때여서, 여러번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도망치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번번이 다시 돌아올만큼 정이 많이 들어버려, 고향의 노래모임을 떠날 때 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토록 원하던 또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결실을 맺어, 1993년 일본으로 대망의 유학을 가게 되었지만 정말 노래나무와의 이별은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래연습보다는 성당앞 맥주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듯하고, 순수한 기도보다는 술잔앞에서의 감사기도가 더 많았던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다 함께 힘을 합쳐 노래책을 발간했던 일 (사랑하면 알리라였던가?), 새로운 시도로 반주를 미리 만들어 놓고 공연하다 계속 안 맞아, 다시 기타반주를 했던일... 찬란했던 엠티, 5월의 얼라대공원 꽃놀이, 이용희 신부님과 했던 월남뽕, 우리를 많이 아껴주시던 청년분과장님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은 분들의 사랑과 지원과 주목을 받았던 노래모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993년.... 여기까지가 제 기타 이야기의 끝이랍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득하기만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음악이라거나 사람, 혹은 친구들을 추억만 하였지 찾아 인연을 이어갈 엄두가 나지 않을만큼의 참 힘겹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월의 부피와 파도는 제가 생각했던것보다 100배, 1000배 힘겨웠습니다. 그렇게 잊고 산 음악 그리고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보려니 지금도 가슴 한켠이 시리네요.  

서두에 밝혔듯이 그리 특별한것 없는 개인잡사입니다. 그래서 그러지 마무리가 잘 안되네요. 사실 이대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아직 조금의 이야기가 더 있어 마무리 형식으로 한편을 더 간단히 올립니다. 가장 중요한게 빠질뻔했네요. 현재의 음악이야기입니다.


후기) 월남뽕으로 코흘리개의 돈을 다 따기만 하던 우리의 이용희 요한 신부님은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가 멕시코사목을 거쳐 LA의 한 한인성당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저의 끈질긴 추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작년까지 왔다갔다하며 살다가 작년 여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네요. 

사진을 보시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