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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11 - 모여라.....

드디어 “모여라” 했던 그날이 왔습니다. 

모두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고서' 당당히 퇴근을 하고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반 기대반의 마음으로 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읍내 여기저기에 내건 포스터라는것이 언뜻봐도 허접한, 그냥 모여라... 일시...장소...시간 정도의 그런것이었기에 그냥 두어명만 모여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 두명도 안오면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감이...... 대강의 준비를 마치고 학생들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다가오자 기대이상으로 대단히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참 기쁘더군요. 

사실 준비과정에서 많은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함께 준비하던 친구들의 성향이 워낙 맞지 않는데다, 음악스타일은 완전 달라서 그저 불협의 극치.... 포크에, 강한 스트로크에 일렉기타에..... 음악적인 면은 그랬지만, 가장 큰 갈등은 뭐니뭐니해도 학생들에게 어떤 음악을 가르치고 유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양이란 친구는 적게나마 학생들에게 이 사회의 모순을 이해시키며 민중가요를 전달하려 했고, 전 순수한 포크만으로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인식을 심어주려 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음악을 통한 청소년 정서 함양 (거창 ^_^) 이었지만..... 운영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막막한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다들 살던 물이 다르니 제각각 자신의 목소리만을 냅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목소리가 전달이 안되면 삐져서 며칠동안 안나오기도 하고, 언성높이며 싸우기도 하고..... 

그런 마찰속에서 일단은 여러가지를 조심스레 시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20여명 남짓의 아이들에게 여러 노래를 가르쳤지요. 저는 제가 늘하던 음악을, 인양이는 서울에서 공수해온 “노찾사” 음악집을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5000원의 월급과 반보루의 은하수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우린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 (?) 이었고, 전면에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거기에 아주 약간의 대학노래패 형식까지 띄게 되었습니다. 동네의 보안사 (그때는 그랬습니다) 에서 불온한 세력의 준동 (?) 으로 오해하여 사찰이라도 실시하게 되면 (보안대에서 근무하던 방위동기 녀석에게 직접 '조심좀 하지' 하는 말을 듣기도... 흐미...), 재수없을경우 국가의 녹봉대신 철봉 (?) 을 탈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사실 컸지요. 아주 작은 동네고 누가 어디에서 술마셨다더라하는 것까지 금방 알게되는.....  

그래서 할수없이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던 형님 한분을 회장으로 옹립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전면에 나서도록 부탁드려 운영해 나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다들 처음으로 하는 경험이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문화코드를 빠르게 흡수해 나갔습니다. 앞에도 말했지만 극장하나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한 젊은이에게는 당구장이나, 술집 등등의 유흥이라도 있었지만, 학생신분의 아이들에겐 그 무엇하나 향유할수 없는 문화라는게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문화적인 코드야 말로 학생들에게는 가장 강하게 어필할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단체가 조금씩 커지고 하며 때맞침 문화원의 증개축이 끝났고, 유명무실하기만 하던 문화원에 처음으로 문화적인 것들을 도입한 우리 모임이 상설기구로 문ㄹ화원의 한 방을 차지할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문화원장님의 일장연설이 있었습니다. 짝짝짝!!! 새건물에 완전 새방을 갖게 되던날 우리모두 너무나도 흥분을 하였습니다. 기타도 그곳에 가져다 놓고 방도 꾸미고, 라면도 끓이고... 윽!

모임의 정식명칭도 소리샘이라 칭하고, MT도 가고, 몰려다니고.... 그 당시의 고등학생들에게는 정말 혁신적인 일들이 가능해진겁니다. 모두들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모임에 임하였고, 점점 인간적인 유대도 쌓여가며 틀이 잡혀가니 그동안 노출되었던 갈등들도 무난히 봉합이 되어갔습니다. 

초기멤버중 몇명은 음악적인 감각이 정말 뛰어나고 목소리도 대단히 좋았습니다. 꾸미려 하지 않는 목소리가 저는 너무 좋아서 그중 몇몇에게는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찾아 계속 반복 연습을 시키곤 했습니다. 소리는 내는 법이나, 목소리의 조절, 감정을 실어낼수 있도록 반복하여 연습을 하였지요. 물론, 다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기타연주도 인양이가 맡아 가르쳐 나갔고, 합창, 중창, 솔로 등등의 배분을 생각하며 여러 곡들을 시도하였습니다. 수개월의 연습에 우리도 학생들도 많이 고무되어갔네요. 

몇 달후 첫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이란 개인적인 만족감만으로는 무의미하지요.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표회는 아주 자연스런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건물은 비교적 완성이 되었으나 위에 마련될 예정이던 대강당은 예산부족으로 진행이 안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무대를 세우기는 어려운 여건이었고, 많은 청중을 앉힐수 있는 무대를 그당시 청양에서는 찾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학교강당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몇달간의 빛나는 활동으로 학생들의 엄청난 지지는 이끌어 내었으나, 학교측으로부터는 이미 불온한 모임으로 찍혀버려 애초에 그런 기대는 할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원래 작은 시골마을일수록 작은 진보적 움직임에는 민감합니다. 그냥 아무일없던것처럼 살았으면 하는 마음들이 지배적이죠.  

갑론을박을 하다가 결국은 누군가의 의견대로 저녁에는 거의 일이 없는 '예식장'을 알아보게 되었고, 한곳에서 흔쾌히 승낙을 하여 아주 적은 돈으로 공연장을 확보할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정말 피나는 연습 또 연습...... 시골이라서 그런지 집에까지 가는 버스가 일찍 끊겼습니다. 연습하다 버스가 끊긴 날은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을 동네별로 묶어 택시에 태워 보냈습니다. 우리도 5천원의 대단한 봉급을 받긴하지만.... 용돈을 받아쓰는 입장이었고 다른 도리가 없었지요. 공연일정이 다가오며 그렇게 택시로 귀가하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공연을 위해서는 노래 연습뿐이 아닌 다른 일도 무척 많답니다. 비록 서울에서 하는 것처럼 인쇄를 멋지게 한다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팜플렛만들기부터 티켓만들기, 포스터 붙히기 등등을 일손을 나누어 열심히 준비했지요. 공연 당일, 청양의 청소년들은 공연문화를 거의 접해본적이 없는지라 , 무척이나 생소해해서 공연을 하는 우리보다 구경온 사람들이 더 긴장하는 식이었습니다. 첫곡은 김미옥이라는 친구가 신형원의 "눈"이라는 노래로 풀어나갔습니다. 워낙 타고난 목소리였는데, 그간 갈고 닦아 부르는 노래는 참 듣기 좋았고, 공연 기획자체도 하고 싶던걸 모두 담아 내었기에 보기에도 좋았지요.
 


사실 공연을 마치면 텅빈무대신드롬에 다들 모임을 빠져나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첫 공연을 마친 후에도 아이들은 빠짐없이 연습에 나왔고, 연습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보러 나오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간 우리는 고된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고서' 저녁도 안먹고 문화원으로 다시 출근, 노래연습하고 밤이나 되어야 집에 들어갈만큼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몇명은 정말 그간 어디서 뭐했을까 싶을만큼 비범한 노래솜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연 첫곡 '눈'을 불렀던 친구는 아직도 열심히 노래를 한답니다. 또 다른 친구인 청희라는 아이는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들어버렸지만...) 전국주부노래자랑 본선에도 나왔었다고 하네요. 제가 그렇게 관여했던 1년간은 제 인생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시기였던것 같습니다. 비록 어떤식으로든 음악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제가 채우려던 욕심보다 수천배의 힘을 얻게 되었네요. 

벌써 20이나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때의 모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이후 남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러번의 공연을 하게 되었고, 청양이란 지역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주도적인 모임으로 성장하였답니다. 그러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혹은 청양에 문화의 폭풍이 밀어닥치며 모임은 자꾸 작아져 갔고 공식적인 모임자체는 해체가 되었답니다. 그간, 졸업후 서울로 취직이 되어 가더라도 월급의 태반을 털어 모임을 지탱하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어갈수 있었던듯 합니다. '눈'을 부르던 친구와, 모임의 핵심적이었던 다른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청양에 터를 잡게 되며 상설적인 모임이 아닌 콘서트 위주의 프로젝트모임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은 지금도 일년에 한번씩 바쁜시간 쪼개어 모이고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방위제대후 곧바로 떠나와 삶의 부피에 휩쓸려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던 저같은 사람은 그저 부끄러울뿐입니다. 

그 뒷 이야기.....
함께 모임을 주도했던 제 X알친구인 최인양군은 저보다 2개월후에 '소집해제'를 명받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아 밴드마스터를 하게 되었습니다. 노래도 조금은 하였으나 주로 노찾사의 반주를 담당하게 되었지요. 한번은 인양군의 초청을 받아 세종대 공연에 가게 되었습니다. 무대 중앙에 당당히 앉아 반주를 리드하던 인양군을 보며 제 가슴까지 뿌듯해지더군요. 그 뒤로도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반도 취입했고, 현재는 뮤지컬이나 음악극의 음악감독으로 또 부천에서 통기타 서클을 주도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37년지기가 되지요. 지금은 연락을 잘 안합니다. "인양아! 이 엉아가 다 용서하마 (뭘?). 연락좀 해라"

'님에게'라는 노래도 '아파트'처럼 부르던 우리의 '정통 밤무대' 윤양수군은 그 후에도 여러 밴드를 결성, 지역사회의 뮤지션으로 우뚝섰다가 이젠 늙은 관계루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인터넷 방송사 피디로 일하다 현재는 청양에서 충청일보의 기자로 활동중입니다. 역시 연락 안합니다. "양수야!  이 엉아가 너도 용서하마.... 어떻게 연락이라도..." 

마음 넉넉한 총무 전영준군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몸이 많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제 맘을 많이 아프게 했죠. 역시 연락을 안하여 제가 가끔 전화합니다. ㅋㅋ 사격을 열심히 하고 있죠. 대표선수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다방 DJ출신 진환군은 해박한 음악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재 대전에서 호프집을 운영중입니다. 연락 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ㅋㅋ

'눈'을 불렀던 미옥(여사)는 고향에 정착하였고 부군인 면우군과 더불어 모임의 정기 공연을 매해 기획하고 뒷바라지 하는 기둥부인이 되어있습니다.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