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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미국이야기

미국 깡촌 생존기 2 - Saranac Lake 소개

"9th smallest town in US, and 1st smallest town in NY"

우선 마을 소개를 하겠습니다.

공식데이터 상의 기록이네요.

Population in July 2007: 4,829. Population change since 2000: -3.6%

Males: 2,332 (48.3%)

Females: 2,497 (51.7%)

Races in Saranac Lake:

White Non-Hispanic (96.2%)

Two or more races (1.3%)

American Indian (1.2%)

Hispanic (1.1%)

Black (0.8%)

원래 5000명이라고 했는데, 그 사이 줄었나요..... 암튼.......

북부 뉴욕으로 계절은 4계절이 있다고는 되어 있습니다만.... 그 4계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겨울

아직도 겨울 (aka - 봄)

공사계절 (aka - 여름)

벌써 겨울 (aka - 가을) 

주) aka는 also known as (..라고도 불리운다. 소위...) 의 약어입니다.

10월초에 눈이 오기 시작합니다. 마구 퍼부어 전기가 나갈때도 있는데, 10월입니다. 그전 8월말 정도되면 새벽기온이 영하로 내려갑니다. 암튼 그렇게 10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11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퍼붓고, 12월에는 동네진입로가 눈 터널로 변합니다. 산으로 빙빙 둘러 싸여 있어 외부세계로 가는 길이 눈으로 막힐때가 많아 1-2월은 고립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겨울에 멀리 떨어진 지인을 찾아 가려다 앞이 안보여 되돌아 온 적도 있네요. 원래 바깥세상은 3월이면 꽃피고 새 울지만, 3월이면 한창 겨울인 이곳은 나홀로 겨울모드입니다. 5월이 되어도 눈이 그칠줄 모릅니다. 5월 중순이 되면 그제서야 맨땅이 쬐금 보이고, 5월말이면 온 동네가 진흙밭으로 변하지요. 까만차도 빨간차도 흰차도 전부 흰색입니다. 겨우내 뿌려댄 도로위의 염화칼슘이 차에 엉겨붙어 하얗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안내리는 기간은 공사중 팻말이 떨어질 사이가 없이 땅을 까 제낍니다. 겨우내 육중한 눈미는 트럭이 (snow plower) 수백번씩 밀고 다니기 때문에 도로상태는 죽음이지요.

바로 이웃에 Lake Placid라고 하는 비교적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바로 1932년과 1980년 두 차례의 동계올림픽이 열린곳이기 때문이지요. 15분 가량 떨어진 무쟈게 가까운 곳이지만, 그래도 그곳은 지명도가 있어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도찐 개찐이지만 Lake Placid라도 가면 숨통이 틔곤 하였습니다.

마을자체가 사실은 상당히 예쁩니다. 마을이 생긴 역사는 제가 근무하던 연구소와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연구소는 원래 결핵연구소로 출발하였고, 후에 전반적인 면역학 연구소로 정착이 되었지만, 연구소의 전신은 바로 결핵요양원이었답니다. 전미에서 최초로 세워진 결핵 요양원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결핵환자들이 치료를 위하여 공기 좋고 물 맑은 마을을 찾아 들게 되었고, 그렇게 형성이 된 마을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소 혹은 그 설립자 일족들과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마을 소개를 문답형식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얼마나 작기에........

몇 년을 살며 익숙해지고 학회등으로 외부에 나가게 되어 일로 연관된 사람들과 식사를 하게 될 때도 많습니다. 그때 Saranac Lake가 얼마나 작냐 하는 것이 화제로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함께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난감해 하는데, 동료하나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무언가를 중얼중얼 셉니다 (참! 여기서는 무언가를 셀때 손가락을 엄지부터 꼽아 내려가지 않고,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부터 펴나가며 세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더니 한마디로 정의를 내려줍니다. '우리 마을엔 신호등이 5개 있다" 와! 명쾌하다 하며 박수를 치면서도 얼마나 서글프던지..... ㅠㅠ

차로 지나면서도 마주 오는 차가 누구 차인지 대개는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너 어제 어디갔냐? 저 쪽 기찻길 옆으로 가던데..."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작은 마을이지만, 차의 종류는 다양하고 색깔이나 조금씩 장식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차만으로 누구인지 안다는 건....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Small Towner는 다 연결되어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따로 따로 알게 된 두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이혼하기 전 고부지간 이었다 라거나, "우리 남편 알지? 너 네 연구소 누구누구 전 남편이었지" 라거나 하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인척 관계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6다리만 건너면 전 세계 누구와도 통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small town에서는 대개 한다리면 됩니다. ㅋㅋㅋ Small town을 설명하는 가장 짧으면서도 유명한 말은 "Everybody knows everybody" 모두가 모두를 다 안다 입니다.


뭐든 하나씩.....

어딜가도 여러개씩 있는 것들도 이곳에는 하나씩 있습니다. 버거킹, 맥도날드, 피자헛, 중국집 등등...... 선택의 여지는 없고 그저 있는거 먹고 비싸도 그냥 사고...... 나중에 중국집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만, 버거킹이 경영난으로 닫았다는 거....


이름이 어째..... 영어야?

연구소가 있던 길 이름은 Algonquin Avenue라고 합니다. Onchiota, Ticonderoga... 등등 많은 익숙치 않은 지명들이 있습니다. 영어가 아니라 바로 인디언 말 이랍니다 (상식 한마디 : 이곳에서는 인디언이라는 말이 차별어가 되어서 대개 Native American 이라 부르곤 합니다. 비슷하게 흑인이라 안하고 African American이라 부릅니다). 주먹쥐고 일어서, 늑대와 춤을 같은 사람 이름을 캐빈코스너 주연의 동명 영화에서 접해 보았을 겁니다만.... 지명은 대개 부족의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우선 인디언은 서부에서나 있었던 것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만, 사실 인디언은 미 전역에 있었겠지요. 당연하게도 영국에서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 살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부에만 살았을까요? 서부에서 말타고 쫓고 쫓기고 해야 그림이 살기 때문에 인디언은 대개 서부영화에 등장하게 되면서 인디언=서부 의 등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타기는 좀 그림이 안나옵니다. 그 유명한 모히칸족도 사실은 지금의 뉴욕주 출신입니다 (어째 뭔가 이상합니다만.....). 영화 "모히칸족의 최후"의 배경이 된 곳도 저희가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았지요.


이름이 Lake면 혹시 그 호수?

네! 맞습니다. 이 일대에 대략 1000개의 호수와 연못, 늪 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에 호수가 들어가는 곳이 많습니다. Saranac Lake, Lake Placid, Tupper Lake, Indian Lake, Loon Lake 등등 끝이 없답니다. Saranac Lake만해도 Upper, Middle 그리고 Lower Saranac Lake라는 호수가 있어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중간 중간 dock system이 되어 있어 수위차로 지나가도록 만들어 놓았지요.



미국은 어딜 가든 한국 비디오가게가 있다던데....

참 나..... 처음 이곳에 온 1990년 후반만 해도 인터넷이 처음 시작된 때이고 워낙 시골이다 보니 더욱 문명의 혜택이 적었지요. 몇 년후에 컴퓨터를 사고 끊어질듯 말듯 한 56k 전화모뎀을 연결하여 한국 라디오 AOD파일을 들었을 때, 우린 둘 다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전화이외에는 우리 둘이 떠드는 한국말밖에는 못들었었거든요. 흑흑!! 몇 년이 더 흐르고 한국사람이 몇 명 더 늘어나고 인터넷도 케이블 모뎀으로 바뀌면서 부터는 번갈아 장보러 다니거나, 한국 드라마를 다운 받아 보거나 하는 획기적 발전을 하였으나 그전엔 어림도 없었답니다.


시골이라면 정이 많겠군....

네! 시골이라 정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친해지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곳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고립된 곳에 친인척으로 얽히고 설킨 곳이라서 외부인이, 특히 친척이라 우겨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동양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가 살기는 참..... 워낙 넓어 비행기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든 미국에서 비행기 한번 안타본 사람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태어나서 고향마을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반수를 넘습니다. 그런 폐쇄적인 사회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 정도지요. 거기다 연구소라는 특수시설에 있다 보니 조금 경원시하는 경향까지 있어 무척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정말 버티기 힘든 곳이지요. 우린 워낙 오래 살다보니 떠날 때 즈음에는 너무 슬퍼들 하고, 우리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때서야 "아! 우리가 이곳 사람들에게 드디어 내부인으로 받아들여졌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실감을 하기도 했지요. 메인주, 뉴햄프셔주, 버몬트주 그리고 뉴욕주의 동부 등을 통틀어 뉴잉글랜드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청교도들이 상륙하여 정착해 나가기 시작한 곳이라서 그렇고 그만큼 타인종에 대한 배타심이 강하기도 하지요. 특히나 African American의 인구가 극히 적습니다.


그렇게 작으니 범죄는 없겠네.....

맞습니다. 마을 입구에도 커다란 글씨로 입간판이 있고, "19xx년 (잊었네요) 이후로 범죄가 없는 도시" 라고 커다랗게 써 있습니다. 보통 차에서 내리면 누구나 lock을 합니다만, 이 마을에서는 차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특히나 겨울에는 절대 잠그지 말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겨울이 워낙 춥다보니 (영하 30-40도) 무심코 lock을 했다가 열쇠구멍이 얼어버려 차문을 열 수 없는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핸드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심지어 겨울에는..... 식료품점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지 않은 상태에서 장을 보고는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단 시동을 끄고 나면 급속도로 차안이 냉각이 되고 겨우 덥혀놓은 차안이 아까와서 그런다지요. ㅋㅋㅋ 다른데서 이렇게 했다가는 차 바로 없어집니다. 이런 버릇 때문에 가끔 도시로 장을 보러가거나 제법 큰 옆도시에 가게 되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한참 걸어가다가 다시 와서 차문을 잠그는..... 허걱입니다.

집을 열쇠로 걸고 다닌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체부나 택배아저씨는 아무도 없어도 그냥 집 뒷문을 열고 소포를 놓고 갑니다. 밖에 놓으면 눈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고, 문을 다 잠그지 않는걸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은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건..... 고립된 지역이라서 그런지 교도소가 여럿 있네요. 뉴욕주립교도소와 federal (국립?) 교도소가 가까운 곳에 있어 상당수 지역민의 고정 고용환경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뭐 그렇다고 범죄자들로 우글거리는 그런건 아니고, 가끔 탈옥범들이..... 허걱!


정말 한국사람은 없었나?

우리가 최초의 한국인 이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가기 20여년전쯤에 한국에서 온 연구원이 있었다고 하네요. Dr. Kim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래 산 사람의 증언인데, 이름은 확실치 않네요. 그렇게 알고 몇 년을 살다가 우연히 서울시립무용단의 공연이 근처에서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가 동양인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분이 놀랍게도 한국분이더군요.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오셔서 학교에 다니시다가 록허드슨을 닮은 멋진 미국사람과 결혼하여 Saranac Lake에 30여년을 사셨다던데, 이상하게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말은 잘 하시지만, 워낙 오래되셔서..... 그래서 그 이후에는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니 순서대로 보면 우리가 아마도 세 번째쯤 되네요. Dr. Kim이야기도 그 분께 들었습니다 (어떤 분인지 저도 무척 궁금하네요). 암튼, 처음 갔을때는 식료품점이라도 갈라치면 동양인을 거의 못 본 이 동네 할머니들이 열발자국에 한번씩 멈추어 세워 지수를 쳐다보며 (당시 한 살) 말 걸고 어디서 관광 왔냐, 뭐 여기 산다고? 같은 이야기를 지겹게 반복해야 했답니다. 동양인이 귀한 이곳에 몇 년을 살고서는 어쩌다 마주친 (그것도 두어번) 한국인 관광객이 너무 반가와서 길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이 뜨거워 지기도 했답니다. "어머 어머 이러데서 어떻게 살아... 세상에 김이라도 들고 왔으면 쯧쯧쯧......" 속으로 '우리 김있거든요' 하면서도 그 마음만이라도 너무 고마와서리....

심지어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러 갔는데, 잘은 모르는 그곳 창구 직원이 "참! 너 소포왔더라. 잠깐 기다려" 하며 정확히 제 이름이 적힌 소포를 전달해 준 적도 있네요. 다른 사람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ㅋㅋㅋ

중국사람은 몇 명 있었네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사람은. 어디나 있네요. 그리고 대개 중국음식점도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하나는 꼭 있습니다. 이 마을에도 중국집을 하는 중국인 가족과 그 종업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우리를 신기해 했지요. ㅋㅋㅋ 또 연구소에도 중국에서 온 연구원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후, 연구소에 또 다른 한국사람이 왔습니다. 모르는 사이였긴 하지만 우연히도 대학교 두해 후배였고, 정말 가족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또 몇 년 후에 박사학위를 받은 지수엄마의 절친 가족이 제 소개로 연구소에 오게 되었고, 이 작은 마을에서 이례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인 마피아들....ㅋㅋㅋ 연구소에는 10여개의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연구원들이 코스모폴리탄 연구환경을 만들어 놓았지요 (그런데, 미국의 연구계는 대개 이런 외국인 연구자가 압도적이랍니다). 그래서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동네의 문화환경속에서 그나마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밥과 김치는 어떻게 먹었나?

다음편에 그 처절한 생존기를 엮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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