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회는 최루탄가루가 흩날리던 캠퍼스의 강당에서 성황리에 치루어졌고, 준비과정에 심한 내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지요. 이런 음악 발표회란 단순히 노래하는 가수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세심하게 여러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비교적 많은 돈이 들게 되므로 학교주위 여러 비지니스 스폰서를 모으고, 곡을 모으고, 반주와 노래를 연습해야 하지요. 홍보스텝은 발표회를 알리는 포스터를 디자인하여 인쇄를 해야 하고, 또 팜플렛을 작성하여 인쇄해야 하지요. 기술스텝은 음향과 조명기기를 섭외하고 익혀 발표회 당일 차질없는 음향과 조명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한두명이 필요한 일이 아니고, 또 한두시간 얼렁뚱땅한다고 되어지는 일도 아니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 두시간의 무대를 올리기 위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발표회가 끝이 나고는 열병에 걸렸다 나은 사람처럼 멍한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발표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그 텅빈무대증후군을 견디지 못하여 하나둘씩 써클을 떠나갑니다. 그들을 잡을 힘도 또 명분도 없어졌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써클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일단은 신입생들과 또 다른 동기들을 모아, 심기일전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의 써클을 겪어본적이 없어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선배들은 일단 우리손에 모든걸 맡겨주었지요. 우선, 필요한것은 인간적인 유대.... 늘 함께 지내다보니 우선은 마음들이 통하여 진심이 통하게 되었고, 조금 안좋았던 다른 동기들과도 조금씩은 호전이 되어 많은 일들을 함께 할수 있게 되었네요. 그러던중 한학기가 끝이 나고, 여름방학을 지내며 무거웠던 회장이라는 직책을 넘겨주게 되었네요. 그렇게 2학기가 되니 비교적 무책임 (?) 하게 써클생활에 임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한 선배가 ROTC후 장교복무를 떠나게 되어, 그 선배가 하던 일을 뒤이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밤무대 생음악 가수였지요. 그때는 미사리 이런건 없었지만, 서울 전지역 많은 호프, 레스토랑 등등에서 생음악을 유행처럼 제공하였고, 그에 맞게 노래하는 이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그 일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듭니다. 우선은 그 선배가 함께 노래하던 파트너를 소개받았습니다. 사실은 그분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캠퍼스에선 소문난 노래꾼이었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잘 알던 누나였습니다. 서로의 음악 스타일이 너무 달랐고, 그 분은 그전 파트너와의 곡들만을 고집해서 처음엔 애를 먹었습니다. 우선은 하루하루의 레파토리만을 연습하여 (7-8곡) 곧바로 무대에 서게 되었고, 두어군데 다녀야 했기에, 우린 잠실로 화양리로 숨차게 뛰어야했습니다. 둘 다 학생이어서 그 이상은 무리였기에 일단은 두군데씩만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가끔씩 같은 장소에서 일하던 다른 사람의 대타로 나가는 일은 있었지만, 거의 그 동네에서만 일을 했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에는 수업도 시험도 거의 없었지요. 둘이서 노래하는 거라서, 사실은 무대에서는 힘이 덜 드는 편이었습니다. 둘이 번갈아 한곡씩 하고나서는 거의 듀엣곡이었고, 듀엣곡이 아니라도 일단은 듀엣곡으로 편곡을 해야했기에, 연습이 많이 필요했다. 반주와 선곡 그리고 편곡을 전적으로 제가 해야 했지만, 레파토리가 많이 쌓이고 나서는 특별이 연습을 해야할일이 없었기에 그리 힘은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격조있는 레스토랑과 약간은 시끌벅적한 호프집을 번갈아 일을 했지요. 나중에는 워낙 서로를 잘 알게 되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노래가 신청곡으로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을 만큼 되었습니다.
업소에서 노래를 하다보면 참 안좋은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완전 술집은 아니라서 그리 험한일은 없지만,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일도 허다하지요. 게다가 작은곳은 편한데, 생음악 가수를 여럿둔 상당히 큰 업소의 경우는 영업부장을 따로 두기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사람이 시간배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대에 따라 보수도 달라지고...... 좋은 사람같으면 단순히 인기와 신청곡을 제대로 소화하는지등을 체크하지만, 나쁜 사람은 술값이라도 쥐어주길 바라는 경우도 있지요. 겪지 말아야 할것들을 어린나이에 겪어야 했지요.
수입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밤 시간에 있는 일이라서 수월하게 해낼수 있었다. 그때 가장 흔했던 카페서빙아르바이트가 시간당 700-900원 하던 시기였지만 우린 30분 노래하고 만오천원 정도를 받았던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현금으로.....그때는 과외도 금지되던 시기여서 그 이상의 고수익은 없었을정도입니다. 나쁜점이란..... 일단 비교적 학교와 가까운곳에서 노래하다 보니 가끔씩 후배들이 혹은 친구들이 노래하는 걸 보러 온다는 명목으로 찾아오는 일입니다. 그날은 목터지게 일해서 후배들 배에 전부 맥주로 부어주었다는.....ㅋㅋㅋ 뭐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긴 하지만.... 저녁은 주로 주방의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먹는 비빔밥정도... 그래도 음료수는 그냥 마실수 있었던 정도..... 늦은 밤시간 마지막타임이면 맥주도 그냥 마구..... ㅋㅋㅋ
돈도 돈이지만, 그렇게 다른 이와 함께 노래하는 법, 돈받고 노래하는 법, 신청곡을 받는 법, 그리고 자연스런 화음을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익혀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2학기가 되었습니다.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의 길을 열어 사회분위기는 급속도로 안장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정치적 이슈로는 더이상 학생운동을 끌어갈 힘을 어느정도 상실하게 되지요. 2학기부터는 부분적으로 수업도 이루어져 둘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학업에 지장을 (뭐 그전에 대학공부라는 걸 해본적은 없지만, 암튼...) 주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반주를 못하는 그 누나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했습니다. 전 혼자서 일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아가게 되었고, 수월하게 두어군데의 일을 하게 되었지요. 둘이 하다 혼자서 하려니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혼자서만 연습을 하면 되니 시간부담을 조금은 줄일수 있었지요. 암튼, 그렇게 학교 다니며 일하며 하다 보니 겨울이 되어갔고.......
소위 입영통지서라는걸 받게 되었습니다. 뭐 일이 조금 복잡해져서 훈련소입영 몇일전에야 알게 되었지만 정신없이 가게되어 오히려 다행이더군요. 장군의 아들이라는 단기사병 (방위병) 이었지만, 그 당시의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전 서울의 모부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제 고향인 콩밭매는 아낙의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에서 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암튼, 훈련소에 있는 4주동안 가장 친한 친구와 옆자리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한 가지 기억나는건, 훈련소에는 어딜가든 열을지어 가는데, 식당 입장시에 식당앞에서 조금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냥 두면 안되는 군인의 본분상 대부분 군가를 부르게 합니다. 그 시간은 약간은 긴장이 풀리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랬는지, 바로 그 버릇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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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
우리 내무반의 내무반장이었던 미친개가 “군가에 화음 넣은 놈 누구야!” 하는데, 정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습니다. 우찌 그런일이..... 다행스럽게도 바로 식사입장하여야 했기에 무사히 넘어갔는데, 그 뒤로는 정말 화음이 나오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만, 의식하지 않아도 들어가는 화음은 제 인생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훈련을 마치고 방위 이병 계급장을 달고 곧바로 고향으로 전출이라는 걸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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