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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

광화문 연가 - 이문세 (cover by 빨간내복)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늘 아련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바로 국민학교 5, 6학년 그리고 거기서 한두해를 더한 즈음의 일들입니다어릴적 제가 살던 서대문구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에는 그때 당시 150, 152번 그리고 143번 등의 버스가 다녔지요. 143번은 상도동으로 가는 노선이었던것으로 기억하고, 150번과, 152번은 비슷한 경로로 시내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우리집은 가게앞이라는, 사실 너무나도 평범한 정거장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름대로 가게앞에 정거장이 있어서 그렇게 된것이지만..... 세상에 옛날에 정거장 앞에 가게없는 정거장이 몇이나 된다고 말이지요. ㅎㅎㅎ 그 정거장 근처에는 김탁구가 만드는 빵만큼이나 먹음직스런 빵이 수북히 쌓여있던 새롬제과라는 빵집이 있었고, 친구 아버님이 하시던 서점이 사선으로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암튼, 거기서 150번 혹은 152번을 타고 버스 안내양 누나에게 토큰 내고 앉아 있다보면, 또 하나의 극히 평범한 정거장 이름 '고개앞' 을 지나 커다란 턴을 하게 됩니다. 안내양 누나의 "오라이" 가 빠지면 서운하죠. 응암동 지나 서부병원, 도원극장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꺾어져 인왕산의 무악재를 영차 올라가 홍제동, 독립문 찍고 서대문을 향하게 ㅈ되죠. 서대문에서 좌회전 하여 조금 가다보면 나오던 곳...광화문. 


광화문입구에는 박인희 음악사라고 하는 작은, 기타를 파는 가게가 있었고, 전 그곳에서 중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기타라는 걸 샀습니다. 좀처럼 광화문에서 내릴일은 국민학생 당시엔 많지 않았지만, 중학교때는 광화문에 비교적 자주 가게 된것이 이 박인희 음악사에 들르기 위해서였지요. 방랑자의 가수 박인희씨가 진짜 주인이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광화문은 그래서인지 제겐 어린시절 추억의 초입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네요. 정동길도 그렇고 방송국 공개방송 스튜디오도 또렷이 기억나고 조금 더 커서 가보게 된 정동 세실극장.... 좁은 길따라 담장이 늘어서 있는 길을 목적도 없이 내려가다 보면 낙엽이 뒹구는 모습이 그렇게 운치 있을수 없었는데....... 이문세씨의 노래대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변하였겠지요? 대학 1학년때는 가본 기억이 납니다만....  조금 더 가면 왼쪽 대로로 큰칼 옆에 찬 이순신장군이 보이고... 장군님은 칼을 오른쪽에 찼을까요 왼쪽에 찼을까요 하던 개그맨들의 짓궃은 퀴즈이야기도 생각이 납니다. 얼마전 본 아이리스라는 막 총쏘는 드라마를 보니 이곳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더군요. 친근하게 다가오는 대왕님의 모습은 좋으나...... 우리 이 장군님은아직도 참 높은데 계신데 말이죠 ㅎㅎㅎ

암튼, 그 너머 보이던 덕수궁의 커다란 문은 결국은 한번도 넘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은 그게 그리 아쉽기만 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은 아마도 솔로부대 요원들이 퍼뜨린 괴담일거라는 음모론도 있었지요.

버스는 조금 더 미끌어져 가서 종로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 을지로로 진입하였던것 같습니다.  종로입구에는 한참전에 없어져 버린 그 당시에도 참 낡아 보이던 일제시대의 백화점인 화신, 신신백화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 중학교를 가며 교복을, 고등학교에 가며 교련복을 사러 갔었는데.... 나중엔 없어져 버렸지요. 교련복 사러갔다가 꼬맹이때 반친구였던 아이를 만나기도 하고.....

우리의 버스는 나른한 안내양누나의 안내와 함께 미도파 백화점쪽으로 돌아가지요. 그 뒤로는 롯데백화점이 되었지만, 그때는 미도파백화점이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명동쪽 그 당시에도 쇠락해가던 코스모스백화점도 있었고, 지금도 건재한 신세계가 있었네요. 버스비가 얼마였는지 지금은 잊었지만, 참 적은 돈에 국민학생이 혼자 혹은 두셋이 할수 있던 최장의 여행코스가 바로 여기 미도파까지였던것 같습니다. 5학년때는 늘 옆엔 디자이너 김선생이 있있네요.  6학년때는 아마 다른 친구들과 함께.... 너무 화려하여 주눅이 들곤하던 백화점을 둘러보다가 집으로 오는 극히 일없는 시내구경이었습니다.


미도파에서 돌아서 다시 역촌동으로 돌아오는 순환노선이었기에 내린곳에서 타면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조금은 다르지만, 결국은 광화문을 거쳐 오게 되었지요. 오다보면 보이던 공안과라는 곳이 한글타자기에 쓰이는 자판배열을 만든 공병우 박사님의 안과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지만 공안과라는 간판은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말 오래된것 같지만...겨우 32-3년전이군요...... 음 오래되었네요. ㅠㅠ  

광화문에서 집까지는 상당히 먼거리였음에도 나에게 시내로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길의 관문은 광화문이라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래서 그런지 제 추억의 관문도 광화문입니다. 

한참전에도 부른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불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