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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기타교실

나의 기타 이야기 4 - 생전 처음 노래로 뜨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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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나......

"27번! 당첨". 머릿속 피가 온통 다리로 쏠린듯, 자리에서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내 번호가...... 기어히 내번호가..... 무심한 하느님을 원망할 정신도 없었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는데....  주위 친구들속에 흐르던 안도감의 파도..... 긴장이 풀리는 부시럭 거림을 들을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제 가슴의 고동도 점점 커가고......안그래도 숫기가 없는데다 기타연주의 대가 (?) 가 되었다고는 하나 음박치는 여전하여 노래는 전혀 아니올시다였던 그 제번호가 불리워진겁니다. 앞번에 불려나가 호된 빨래방망이 세례를 받는 몇몇 친구들의 모습을 이미 본터라 긴장감은 극에 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곡은 그전에도 몇번은 들어본 곡이었습니다. 뭐 대세에 큰 영향은 없지만요. 일단 나가서 앞에 서니 오히려 긴장이 조금 풀렸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리속에 홀연히 떠오른 박자..... 슬로우락. 

오호라..... 이곡의 박자가 슬로우락이구나 하는게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역시 기타의 대가. ㅋㅋ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슨 깨달음처럼 떠오른 박자입니다. 속으로 기타반주를 하며 입을 뗍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기어들어갈듯 겨우겨우 내는 멜로디...."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일단 한소절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음 소절을..또 그 다음 소절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한곡을 간주전까지 부르고 났는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우이씨! 이젠 빨래방망이를..." 하며 애꿎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구타전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눈을 감고 계시던 빨방 선생님이 갑자기 천천히 박수를 치시는 겁니다. 이 박수는 아이들에까지 번졌고, 전 어리둥절하여 그 속에 뻥~~한 상태로 서있었네요. 

"정말 애절하고도 간절한 목소리다. 이곡에 가장 잘맞는 목소리로구나. 정말 잘한다" 하시며 "나머지시간은 자습" 이렇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마도 그때쯤 실연을 당하셨는지 자신의 분위기에 젖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계셨고...... 쉬는 시간에 저는 친구들에게 단팥빵을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꾸역꾸역.... 

암튼, 세상에나.. 음치에 박치가 처음으로 노래로 그것도 무차별 구타의 폭력앞에서 부른노래로 칭찬을 받은겁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기어들어가던 목소리를 애절하다니요..... 

그 이후로 저는 정말 달라졌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그 사건으로 친구들의 저에 대한 존경심은 극에 달하였고, 기타에 이어 이젠 노래까지.... 푸하하!!!!

그때 떠오른 슬로우락의 리듬. 그 강렬함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전 그때부터 노래를 파고 듭니다. 한 곡을 적어도 100번은 계속 반복해서 듣는 훈련을 합니다.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같은 노래도 이때쯤 나온걸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조용필의 시대였지요. 하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기타로 하기는 좀 무리가 있었네요. 거기다 음치가....ㅋㅋㅋ 찾아보니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탔다고 하네요. 정말 파워풀한 창법이 기억에 남습니다. 팝으로는 Centerfold나 Ebony and Ivory, Eye of the Tiger같은 곡들이 유행을 했네요 (인터넷 참조). 

이때는 건전가요라는 것이 있어 가수가 음반을 내면 꼭 건전가요라는 것을 마지막에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군부의 장악으로 대부분의 사회제도마저 군대식으로 밀어부쳤던 탓에 '사회정화'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만든 제도랍니다. 가수들이 선호했던 건전가요로는 ‘조국찬가’, ‘어허야 둥기둥기’, ‘시장에 가면’ ‘새마을 노래’, ‘꽃동네 새동네’, ‘잘살아보세’ 등이 있었지요. 어허여 둥기둥기는 해바라기가 불렀고, 시장에 가면은 혜은이가 불렀던 곡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마 그 뒤로도 한참은 계속 되었던것 같네요. 


이 건전가요만 모아둔 음반에 정수라의 그 유명한 "아 대한민국" 이 들어있다가 1983년에 독집에 발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운동장에서 응원가로 많이 불리웠던 생각이 나네요. 나중에는 어용가요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기 이를데 없는데......... 뭐 아침에 또 일몰에 태극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하여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적도 있었는걸요. 극장에서는 영화를 보기전에 애국가를 하여 모두 일어나야했고 (그게 싫어 그 시간쯤 화장실에 가던 기억이.....비애국자의 비애입니다), 대한늬우스 (부활소식이 들리네요.. 반가와 해야 하는건가요?) 와 배달의 기수도 생각이 납니다. 



싫든 좋든 모두 시대상을 반영한 것들인데, 지금에 와서는 추억으로 다가오네요. 변변치 못한 개인사를 들추다 보니 그때 그시절 생각이 나서 글이 산으로 갔네요. 생각해보면 25-6년전이니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이후로 어쩜 이렇게 많이 변했는지... 

암튼, 박치탈출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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