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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그때 그시절 - 어허야 둥기둥기로 알아본 건전가요

예전에는 음반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음반법) 이라는것이 있어 제작되는 모든 음반및 비디오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거쳐 출시의 가부를 결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사를 마음대로 고치거나 음반 자체를 출시불가로 만들어버릴수 있는 법. 바로 사전겸열제였습니다. 이 희안하기까지 한 음반법의 뒤에는 박정희의 유신헌법이라는 악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사회를 변혁할 직접적 무기가 되기에는 조금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 불씨가 될수 있음을 정권은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미리 그 불씨를 꺼버리자는 것이 주 목적이었겠지요. 거기에 군사혁명으로 자리한 정권이었던 만큼 사회에 팽배해있던 획일성, 자유보다는 구속의 의도 담고 있을겁니다. 

이런 법이 제정된것이 1975년이라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소급적용으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게 된것이 그 이름도 슬픈 '금지곡'이라는 레떼루. 좋은 가사상까지 받았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불리워졌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금지곡지정을 받았던 것도 이런 법규정이었고, 장발을 드러낸 쟈켓사진때문에 음반이 폐기처분되기도 하였습니다. 사회가 병영도 아닌데, 장발을 단속하던 시기의 웃지못할 헤프닝입니다. 한마디로 전전한 사회의 풍기를 문란케 할 사안은 모조리 검열대상이었다지요. 그 사유도 제각각입니다. 창법저속, 왜색 등의 검열자의 주관이 다분히 포함된 사유도 있었지만, 사회의 암울한 부분을 들추어 내어 불신을 조장한다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사유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김민기씨는 아침이슬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곡이 금지되어 작품활동자체를 하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인권침해 까지도 자행되었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사실에 대해 예지자의 힘을 빌어 단죄하던 마이너리티리포트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건전한 사회의 풍기를 문란케할......" 그렇고 그런 가요들을 금지하다보니.... 아무래도 이 사회의 건전화를 선도할 건전한 가요의 보급이 절실해졌을 법합니다. 그래서 나온것들이 바로 건전가요 노래집 같은 정부의 프로파간다용 노래들이었습니다. 조국찬가, 군가등을 넣어 만들어졌던 음반들이 나옵니다. 새국민 건전가요21 같은 가요집이죠. 그러다가.......



발매되는 모든 음반에는 장르에 관계없이 건전가요라는 걸 마무리 곡으로 넣게 되어버렸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들국화의 음반에도 보면 돌고돌고돌고, 행진 등의 노래가 나오고는 B면 마지막 곡은 바로 혜은이의 시장에 가면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하나는 무조건 넣어야 했던 시절. 가장 인기있던 (?) 곡은 해바라기나 이문세가 불렀던 어허야 둥기둥기 였지요.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던 이 건전가요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으나 (골수팬은 있습니다만, 적어도 음반제작자나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음반을 내야했던 가수들은 되도록 짧은 노래를 선호했다고 하지요. 1988년 올림픽 즈음하여 슬며시 적어지다 90년대에는 완전히 없어진 걸로 압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시작전에 꼭 애국가를 틀고 모두 일어나야했던 것이 없어진 것은 아마 이것보다 조금 전이었나요? 대한늬우스나 TV의 배달의 기수도 이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즈음하여 전국을 휘덮었던 불법복제 테이프를 팔던 리어커에서 심심치 않게 금지곡 모음 같은 테이프들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하였습니다.  



사전검열 음반법은 무수히 많은 검열의 피해를 입었던 정태춘씨의 주도로 시민저항운동으로 이어오다 1996년 폐지 되었습니다. 당시 한창 가요계를 선도하던 서태지가 교실이데아등이 심의에 걸리기도 하자 반발하여 이 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서태지의 공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암튼, 음반검열의 검은 그림자와 건전가요라는 이름의 썰렁 가요가 없어진지도 오래 되는군요. 

사실 건전가요의 최대 수혜자로는 정수라를 꼽을수 있을겁니다. 1983년 건전가요집에 수록되었던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은 건전가요로 불리우다가 제도권으로 진입하였고, 엄청나게 방송을 타게 되었죠. 정수라씨의 입장에서는 억울할수 밖에 없겠지만, 아! 대한민국은 전두환 정권의 용비어천가로 많은 이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정태춘씨는 같은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어 당시의 대한민국은 강물에 유람선이 떠있는 낙원이 아닌 백골단으로 대표되는 식민독재의 존재와 장가를 가지못해 농약을 먹고 숨지는 농촌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아! 대한민국을 비틀 정도였습니다. 



작사가 박건호씨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물론 정부의 요청으로 건전가요라는 것을 작사하였는데, 자신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적은것이 전두환 찬가로 변하는 모습에 무척이나 놀랐다고 하지요. 


정태춘은 그의 음반 무진새노래에 자신이 북을 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직접 건전가요로 불렀습니다. 원곡의 위치는 어떠할지라도 (일단 요건은 갖춘것이 되니 심의도 통과하고....) 그 곡은 오히려 그 음반의 전체적인 어조와 맞아 떨어져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곡은 정태춘의 마당놀이 공연의 단골곡이 되었지요. 

변진섭이 가요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1980년대 중반 그는 건전가요로 과수원길을 자신이 불러 넣었습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건전가요인 과수원길마저도 가요 차트에 올라갈 정도였습니다. 

정말 웃지못할 이야기들이죠.  

한참 달콤한 발라드 음악에 빠져 듣다가 갑자기...... "아~아~ 믿음속 상거래로 만들자 따뜻한 사회....." 이러면 갑자기 힘이 쫙! ㅎㅎㅎ 

1977년에 발매된 저 위 그림에도 보이는 새국민 건전가요 21이라는 음반에는 다음과 같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from ManiaDB)

꽃피우자 건설로 같은 곡이나 새마을 노래 같은 곡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죠. 그중 아주 심하게 기억에 남는 곡은...... 바로 꽃동네 새동네라는 곡이네요.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듯 한데요........

뜰 아래 반짝이는 햇살 같이
창가에 속삭이는 별빛 같이
반짝이는 마음들이 모여삽니다
오손도손 속삭이며 살아갑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은 있지요
웃음이 피어나는 꽃동네 새동네
행복이 번져가는 꽃동네 새동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무렵 등하교시에는 꼭 틀어주던 "건전가요" 였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합창대회 같은것도 하고 보급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이곡은 지금 동요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요란 아이에게 동심을 심어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그런데 원곡은 새마을 노래나 예비군노래, 승리의 노래, 조국찬가 등과 함께 들어있네요. ㅎㅎㅎ 제 생각에는 동요는 아닐듯..... "싸우며 일하고, 일하며 싸우세..."같은 노래가 농촌에서 모심던 농부들이 갑자기 마을창고에서 카빈소통을 지급받으며 뒷동산으로 뛰어가던 '뮤직비디오'와 함께 매일 저녁마다 나오던 시기이기도 하네요. ㅎㅎ  그러고 보니 건전가요는 이렇게 음반에만 존재하던것이 아니라 생활에 깊숙히 파고 들어있었군요. 음악이란 사회변혁의 무기도 되나봅니다. ㅋㅋ 

얼마전 뉴스에 국정뉴스였던 추억의 대한늬우스를 코믹버전으로 국정시책의 홍보용으로 한달간의 한시적인 기간동안 영화상영전에 보였다고 하더군요. 미학적으로보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씁쓸함을 지울수는 없네요. 할수없이 썩소를 날려주었지만..... 암튼, 시절이 수상하니 별게 다 부활하고.......조금있으면 건전가요도 부활할지 모른다는... ㅎㅎ 잡혀가면 안되니 그만하죠 ㅋㅋ 



본론으로 돌아와 가장 많은 음반이 팔린 단일곡하면 아마도 시장에 가면이나 어허야 둥기둥기일겁니다. 

얼마전 이문세의 깊은밤을 날아서를 노래했는데, 브라질에 사시는 Amosera님이 힘들었던 이민초기 이문세의 4집을 들으며 어려움을 이겨내셨다 하며 건전가요 어허야 둥기둥기를 불러 보라 하셔서 그것만 하면 좀 뻘쭘할것 같아 그냥 옛이야기도 함께 풀어보았습니다. 노래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하도 많이 들어서 연습도 안하고 그냥 불렀네요. 네 맞습니다. 저 Amosera님처럼 매니아입니다. 하하하~~~





Amosera님! 시장에 가면은 신청하시면 안됩니다. ㅎㅎㅎㅎ